항목 ID | GC026007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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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盧崇 |
영어음역 | No Sung |
이칭/별칭 | 중보,상촌,경평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창섭 |
[정의]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 전라북도 김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중보(中甫), 호는 상촌(桑村). 아버지는 감찰지평(監察持平) 노준경(盧俊卿), 할아버지는 대호군(大護軍) 노단(盧亶), 어머니는 비순위별장(備巡衛別將) 이천로(李天老)의 딸이고, 아내는 김극치(金克致)의 딸 및 김후(金厚)의 딸이다. 아들은 노상인(盧尙仁)·노상의(盧尙義)·노상례(盧尙禮)·노상지(盧尙智)·노상신(盧尙信)이다.
[활동사항]
노숭(盧崇)[1337~1414]은 고려시대인 1365년(공민왕 14)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정언(正言)·지신사(知申事)·대사헌·지밀직(知密直)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389년(공양왕 원년)에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용안(龍安)[지금의 익산]과 영산(榮山)[지금의 나주시]에 각각 득성창(得成倉)과 영산창(榮山倉)을 세우고 성을 쌓아 조운을 편리하게 하고 왜구 피해를 막았다. 또한 조세를 3년 동안 면제시켜주도록 조정에 건의하였으며, 의창(義倉)이 없는 주군(州郡)에 이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조선 개국 후 개성유후(開城留後)를 거쳐 경기좌도도관찰사(京畿左道都觀察使)가 되었고, 1400년(정종 2)에는 삼사좌사지의정부사(三司左司知議政府事)로 발탁되었으나 노모의 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다음해에 참판승추부사(叅判承樞府事)로 기복(起復)되었고, 그 뒤 참찬의정부사(叅贊議政府事)를 거쳐 검교우의정(檢校右議政)에 이르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김제에서 우거(寓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학문과 사상]
노숭은 희유(嬉遊)를 좋아하지 않고 신불(神佛)을 섬기지 않아, 죽을 때에는 “죽은 뒤에 불사(佛事)를 쓰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묘소]
서울시 구로구 천왕동 산 39번지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조선 개국 후에 한양윤(漢陽尹)으로 개국원종공신에 추가로 녹훈되었고 공신전 30결을 받았다. 상주의 옥연사(玉淵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경평(敬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