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7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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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宜中 |
영어음역 | Bak Uijung |
이칭/별칭 | 박실(朴實),자허(子虛),정재(貞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창섭 |
[정의]
조선 전기 전라북도 김제 지역에서 만년을 보낸 문신.
[가계]
본관은 밀성(密城). 자허(子虛), 호는 정재(貞齋), 초명은 박실(朴實)이다. 아버지는 판도총랑(版圖摠郞)인 박인기(朴仁杞)이다. 아들은 박경빈(朴景贇)·박경무(朴景武)·박경문(朴景文)이다.
[활동사항]
박의중(朴宜中)[1337~1403]은 1362년(공민왕 11) 과거에서 장원에 뽑히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헌납(獻納),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밀직제학(密直提學) 등을 지냈다. 밀직제학이었던 1388년(우왕 14)에 명나라에서 철령(鐵嶺) 이북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여 요동 관할에 두려 할 때,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철령부터 공험진(公險鎭)에 이르는 지역은 대대로 고려 땅이었으므로 이 지역에 철령위를 설치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다. 조선 개국 후에는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를 지내고 은퇴해서는 김제 지역에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사상]
공양왕 때에 서운관(書雲觀)에서 개경의 지운(地運)이 다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한양으로 천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자, 음양설의 허황함을 역설하며 반대하였다. 학문이 매우 높아 고려에서는 성균대사성을 지냈고, 조선 건국 후에는 예문관학사(藝文館學士)로 있으면서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정총(鄭摠)·윤소종(尹紹宗) 등과 함께 『고려사(高麗史)』 수찬에 참여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정재일고(貞齋逸稿)』가 있다.
[상훈과 추모]
창왕 때 추성보조공신(推誠補祚功臣)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