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7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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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湛 |
영어음역 | Jeong Dam |
이칭/별칭 | 언결(彦潔)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창섭 |
[정의]
조선 전기 전라북도 김제군수를 지낸 무신.
[가계]
본관은 영덕(盈德). 자는 언결(彦潔)이다. 아버지는 정창국(鄭昌國)이다.
[활동사항]
정담(鄭湛)은 1583년(선조 16)에 무과에 급제하여 니탕개(尼湯介)의 변에서 공을 세우고 여러 벼슬을 거쳐 1592년(선조 25)에 김제군수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 휘하의 일본군은 용담(龍潭)·진안(鎭安)을 공격하여 웅치(熊峙)[지금의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소재]를 넘고, 별군 1,000명은 진산(珍山)에 진을 치고 이치(梨峙)를 넘어서 전주를 점령하려 하였다. 김제군수로 전주진관병마첨절사(全州鎭管兵馬僉節使)였던 정담은 일본군을 맞아 7월 7~8일 양일간 웅치에서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 해남현감 변응정(邊應井), 의병장 황박(黃樸) 등과 함께 싸운 끝에 일본군의 진격을 막았으나 전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전투에서 이긴 일본군은 조선군의 충성심과 용맹에 깊이 탄복하여 전사한 조선군의 유해를 모아 무덤을 만들고, ‘조조선국충간의담(吊朝鮮國忠肝義膽)’이라는 표목을 세워 영혼을 위로하였다.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255-1에 정려가 있다. 1690년(숙종 16)에 정문(旌門)을 세웠는데 처음에는 마을 가운데에 목비(木碑)로 세웠다가, 1782년(정조 5) 마을 앞 길가에 석비(石碑)로 다시 세웠다. 뒤에 병조참판을 추증받았으며 영해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