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7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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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泰秀 |
영어음역 | Jang Taesu |
이칭/별칭 | 일유재(一逌齋),성안(聖安)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창섭,김승대 |
[정의]
개항기전라북도 김제 출신의 문신이자 순국지사.
[가계]
장태수(張泰秀)의 본관은 인동(仁同)이고, 자는 성안(聖安), 호는 일유재(一逌齋)이다. 1841년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구 상신리] 서둔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내부협판을 지낸 장한두(張漢斗)이다.
[활동사항]
1861년(조선 철종 12)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제수된 뒤 전적(典籍), 선략장군부사과(宣略將軍副司果), 예조정랑(禮祖正郎),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정언(正言), 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1867년(고종 4) 양산군수(梁山郡守)에 임명되어 방어시설 및 군대를 정비하고,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조영규(趙英珪)의 제단을 보수하고 제향하였다. 이후 병조참의(兵曹叅議),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동부승지(同副承旨), 경연참찬관(經筵叅贊官), 춘추관수찬관(春秋官修撰官) 등을 지내고, 1894년에 고산현감(高山縣監)에 부임하였다.
1895년 단발령이 내리자 사직하고 스스로 남강거사(南岡居士)라 하고 은거하였다. 그러나 1904년 이후 다시 관계에 진출하여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시종원부경(侍從院副卿), 칙임관3등에 임명되었다.
을사조약 체결 후 을사오적의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1910년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그는 일제가 준 은사금(恩賜金)을 거부하고, 중신으로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허물이 오적(五賊)에게만 있지 않다 하며, 나라가 망하였으나 그 원수를 치지 못한 불충과 자신의 이름이 원수들의 문적(文籍)에 실려 더럽혀짐으로써 조상을 욕되게 한 불효의 죄를 죽음으로 씻는다는 내용의 자죄문을 쓰고 단식하다 순국하였다.
[저술 및 작품]
장태수의 시(詩)와 문집 두 권이 전하고 있으며, 서울에 사는 증손 장방호(張方浩)가 보관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양산군수로 재직할 때 세운 공로에 대해 경상도관찰사 김세호(金世鎬)가 포상을 상신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935년에 김제시 금구면 상신리에 세운 서강사에 배향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장태수 선생 유물 6종 57점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05호로 지정되어 있고, 생가인 남강정사(南崗精舍)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64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