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7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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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鳳城溫氏集姓村 |
영어의미역 | Bongseong On Clans Village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산동리 |
집필자 | 김승대 |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산동리에 있는 봉성 온씨 집성촌.
[형성 및 변천]
봉성온씨(鳳城溫氏)는 온달(溫達)을 시조로 하고 수신재(守愼齋) 온신(溫信)을 입향조로 하는 김제시 세거성씨 가운데 하나이다. 후손들이 지금의 금구면 일대인 봉성에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었으므로 달리 금구온씨(金溝溫氏)라고도 한다.
입향조인 온신은 1366년(공민왕 15) 12월 이존오(李存吾)·정추(鄭樞) 등과 더불어 권신 신돈(辛旽)의 농간에 대한 탄핵 상소를 하였는데, 이 일로 이존오가 추방되자 분연히 일어나 불가함을 주장하다가 거야부곡(巨野部曲)[지금의 김제시 금산면 삼봉리 거야마을]에 유배되었다.
온신의 아들 운림(雲林) 온림(溫琳)은 공양왕 때에 좌랑 벼슬을 지냈고, 고려 말에 두문동에 들어가 이성계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봉의동(鳳儀洞)에 숨어 살며 스스로 운림한사(雲林寒士)라 하였다. 금서(琴書)와 산수(山水)를 즐기다가 이곳에서 여생을 마치니, 고을 사람들이 의중고사(義中高士)라 하였다.
온신의 손자 한수재 온윤(溫潤)은 고려가 망한 뒤 할아버지의 유훈을 따라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정원에 한매(寒梅)와 녹죽(綠竹)을 심어서 심정을 한매와 같이 차고 녹죽과 같이 푸르게 가지라는 선대의 훈계를 지키며 지내다 생을 마치니, 고을 사람들이 임하처사(林下處士)라 하였다.
온신의 증손 한정(閒汀) 온후(溫厚)는 세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단종 대에 걸쳐 선전관을 지내다가 단종이 손위(遜位)하자 크게 깨우친 바 있어 벼슬에서 물러났다. 다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전주 상관에 숨어 사니, 그 끼친 바람이 맑고 차서 호를 한정이라 하였다.
[현황]
관련 유적으로 김제시 금구면 산동리 산57-1번지 대율마을에 사현사(四賢祠)가 있다. 1934년 3월 28일 창건된 사현사에는 주벽에 온신을 모시고 온림, 온윤, 온후를 배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