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7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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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野城鄭氏集姓村 |
영어의미역 | Yaseong Jeong Clan Village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하정리 |
집필자 | 김승대 |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하정리 학당마을에 있는 집성촌.
[개설]
야성정씨(野城鄭氏)는 영덕정씨(盈德鄭氏)라고도 하며, 정가후(鄭可侯)를 시조로 한다. 야성이란 명칭은 757년(경덕왕 16) 영덕·영해 지역인 야시홀을 야성군(野城郡)으로 바꾼 데서 유래하였다. 시조 정가후는 연일정씨(延日鄭氏) 시조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으로 고려 희종 때 대사도(大司徒)를 지냈다. 고려·몽골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공을 세워 원나라로부터 관군민천호(管軍民千戶)를 받았고, 1239년(고종 26) 야성군(野城君)에 봉해졌다. 이후 후손들이 야성[영덕]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형성 및 변천]
야성정씨는 정가후를 시조로 하고 김제군수를 역임한 정담(鄭湛)의 후손을 입향조로 하는 김제시 세거성씨 가운데 하나이다. 현재 후손들이 김제시 백산면 하정리 학당마을을 중심으로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다.
정담은 정창국(鄭昌國)의 아들로 자는 언결(彦潔)이다.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여 이탕개(尼湯介)의 난을 진압하여 공을 세우고, 여러 벼슬을 거쳐 1592년 김제군수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 해남현감 변응정(邊應井), 의병장 황박(黃樸) 등과 함께 웅치(熊峙)를 방어하였다.
이때 금산을 거쳐 전주를 점령하려는 고바야카와 다카카케[小早川隆景] 휘하의 일본군을 7월 7일과 8일 양일간에 걸쳐 웅치에서 백병전으로 끝까지 방어하여 일본군의 진격을 막아 냈으나 정담과 휘하 군사들은 모두 전사하였다. 일본군은 그 충절에 경의를 표하여 ‘조조선국충의간담(弔朝鮮國忠義肝膽)’이라는 묘비를 세웠다. 1690년(숙종 16) 조정에서 정려를 내렸고, 뒤에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영해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