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7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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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延日鄭氏集姓村 |
영어의미역 | Yeonil Jeong Clan Village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용지면 구암리 |
집필자 | 김승대 |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용지면 구암리 평고마을에 있는 연일 정씨 집성촌.
[개설]
연일정씨(延日鄭氏)는 사로국 6부촌 가운데 취산진지촌(嘴山珍支村) 촌장 지백호(智伯虎)가 서기 32년(유리왕 9)에 유리왕으로부터 다른 5촌장들과 함께 성을 하사 받을 때 본피부로 개칭되면서 정씨(鄭氏) 성을 하사 받은 것이 시초이다. 우리나라의 정씨는 후대에 여러 갈래로 갈라지면서 본관은 달리하나 모두 지백호의 후예들인 셈이다.
연일정씨는 연원은 같으면서도 소목(昭穆)을 밝히지 못하는 두 파가 있다. 한 파는 고려 의종 때 중신으로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지낸 정습명(鄭襲明)을 일세조(一世祖)로 하는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인 정몽주(鄭夢周)·정문예(鄭文裔) 계이고, 다른 한 파는 고려 때 감무(監務)를 지낸 정극유(鄭克儒)를 일세조로 하는 감무공파(監務公派)인 정사도(鄭思道)·정철(鄭澈) 계이다.
[형성 및 변천]
연일정씨는 지백호를 시조로 하고 조선 중기의 문신 정철[1536~1593]의 후손들을 입향조로 하는 김제시 세거성씨 가운데 하나이다. 김제시 용지면 구암리 평고마을에 세거한 대표 인물로 정복환(鄭福煥)[1736~?]이 있다. 1766년(영조 42) 정시(庭試) 병과에 합격하여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인물로, 증조할아버지는 정흡(鄭翕), 할아버지는 정민하(鄭敏河)이며, 아버지는 정백(鄭栢)이고, 외할아버지는 조상노(趙相老)이다. 부인은 이익열(李翊烈)의 딸이다.
정복환은 현재 김제시 용지면 구암리에 있는 구암서원(龜岩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구암서원은 1807년(순조 7) 창건하였고, 1868년(고종 5) 철폐되었다가 1902년(고종 39) 지금의 자리에 단을 설치하였다. 1967년 단이 있던 자리에 사당을 지어 오늘에 이른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황거중(黃居中)·황응청(黃應淸)·정홍명(鄭弘溟)·황극호 등을 배향하고 있다.
정홍명[1592~1650]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 정철의 아들이다. 김장생(金長生)의 학풍을 이어 주자학 경전과 예학(禮學)에 밝았다. 송익필(宋翼弼)·김장생에게 수학했고, 1616년(광해군 8) 증광 문과에 합격했다. 승문원에 보임되었으나 대북파(大北派)의 견제를 받자 사직하고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힘을 쏟았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 서인 정권이 들어서자 복직하여 예문관검열·정자·수찬을 거쳤고, 다음 해 이괄(李适)의 난 때는 공주까지 왕을 호종(扈從)했다. 한양으로 돌아온 뒤 장예원정언·장예원헌납·이조정랑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1627년 사헌부집의를 거쳐 홍문관부제학·성균관대사성·김제군수 등을 역임한 뒤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소모사(召募使)로 활약했고, 전쟁 후에는 함양군수를 지냈다. 1646년(인조 24) 대제학을 끝으로 은퇴하여 주자학 연구에 힘을 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