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6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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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堤金山寺慧德王師塔碑 |
영어의미역 | Hyedeok Royal Preceptor's Memorial Stele of Geumsansa Temple |
이칭/별칭 | 금산사 혜덕왕사진응탑비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모악15길 1]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서홍식 |
문화재 지정 일시 | 1963년 1월 21일 -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 보물 제24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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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 보물 재지정 |
성격 | 탑비 |
건립시기/일시 | 1111년(예종 6) |
관련인물 | 혜덕왕사(慧德王師) |
재질 | 대리석|화강암 |
높이 | 2.78m |
너비 | 1.5m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모악15길 1] |
소유자 | 금산사 |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금산사에 있는 고려 전기 혜덕왕사의 탑비.
[개설]
혜덕왕사(慧德王師)[1038~1096]는 고려 전기의 승려로, 속성은 이(李)고 이름은 소현(韶顯)이다. 11세 때 해안사(海安寺)의 지광국사(智光國師) 제자로 들어갔고, 1061년(문종 15) 경기도 개성의 송악산에 있는 왕륜사(王輪寺)에서 치러진 승과에서 합격하였다. 1079년(문종 33) 금산사의 주지로 부임한 뒤 금산사를 재건하고 봉천원구(奉天院區)와 광교원구(廣敎院區)를 확장하였다.
[건립경위]
1096년(숙종 1) 12월 봉천원구에서 59세로 입적하자, 나라에서 혜덕왕사라는 시호를 내린 뒤, 1111년(예종 6) 탑호를 진응탑비(眞應塔碑)라 하고 금산사 동쪽 부도전 내에 세웠다.
[위치]
금산사의 동편으로 모악산 정상을 따라 약 300m쯤 가다 보면 왼쪽에 부도전이 있다.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는 부도전 내에서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옛 봉천원구 북쪽에 해당한다.
[형태]
비의 형태로 보아 원래는 이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없으며, 탑비와 귀부, 비신, 그리고 지대석만 남아 있다. 비신은 장방형으로 높이 2.78m, 너비 1.5m, 두께 0.18m에 이르는 대리석으로서, 높이 0.6m, 길이 2.55m의 화강암제 귀부 위에 세워져 있다. 귀부의 구상(龜像)은 몸체에 비해서 머리는 작은 편이며, 조각이 매우 뚜렷하여 강한 기운이 느껴진다.
글씨는 사방 약 2m 정도로 새겨져 있으며, 당나라 구양순체의 해서로 매우 정교하면서 대단히 뛰어난 솜씨이다. 전면은 43행 77자씩 새겼고, 둘레에는 당초문을 장식하였다. 육각의 갑문(甲文) 중앙부에는 비신 삽입부를 조각하였는데, 둘레를 22엽의 중판화문(重瓣花文)을 새긴 귀부를 방형 지대석 위에 석재로 새겼으며, 지대석 네 측면에는 파린문(波鱗文)을 새겼다.
[금석문]
비의 제액(題額)은 ‘증시혜덕왕사진응지탑비명(贈諡慧德王師眞應之塔碑銘)’이고 비제(碑題)는 ‘고려국전주대유가업금산사보리수정진요익융광구우호세능화중관증시혜덕왕사진응지탑비명병서(高麗國全州大楡伽業金山寺普利首精進饒益融廣口祐護世能化中觀贈諡慧德王師眞應之塔碑銘幷序)’라 기록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대표적인 문벌 가문인 인주이씨(仁州李氏) 이자연(李子淵)의 아들로서 가계와 탄생, 그리고 출가와 수행을 서술하고, 금산사에 광교원(廣敎院)을 설치하여 유식(唯識) 경전을 간행한 사실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또한 입적 후 재를 지낸 경비를 조정에서 지원한 내용도 언급하고 있다.
음기에는 혜덕왕사의 문도(門徒)를 열거하였는데, 스승인 지광국사(智光國師)의 비석과 같이 수교계업자(受敎繼業者)·수직가계자(隨職加階者)·모덕귀화자(慕德歸化者)·사지전후몰세자(師之前後沒世者)의 네 부류로 구분하여 각각의 부류마다 승통(僧統), 수좌(首座), 삼중대사(三重大師), 중대사(重大師), 대사(大師)로 나누어 인명을 열거한 자가 110여 인이고, 언급된 인명은 1800여 명에 이른다.
글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은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 등의 기록에는 글을 지은 사람을 이모(李某)로, 쓴 사람을 정윤(鄭允)으로 보고 있으며, 음기를 쓴 사람을 채유탄(蔡惟誕)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문 끝에 ‘천경원년세재신묘맹하월(天慶元年歲在辛卯孟夏月)’이란 기년이 있어 1111년(예종 6)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혜덕왕사가 입적하고 나서 15년 후의 일이다.
[현황]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는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4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금산사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전체적인 것은 마모가 심하여 알아보기 어렵지만 알아 볼 수 있는 비문의 내용에는 당시 대표적인 문벌가인 인주이씨 이자연의 아들로서 가계와 탄생 그리고 출가와 수행을 서술하고, 금산사에 광교원을 설치하여 유식 전적을 간행한 사실과 입적 후 재를 지낸 경비를 조정에서 지원한 내용, 그리고 음기에는 왕사의 문도를 열거하였는데 승통, 수좌, 삼중대사, 중대사, 대사로 나누어 인명을 열거한 자가 110여 명이고 언급된 인명은 1천8백 명에 이른다.
[의의와 평가]
김제 지역뿐만 아니라 전라북도 전역에서 고려시대에 세워진 비는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도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는 불교사적으로서 뿐만 아니라 서예사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또한 내용면에서도 고려시대 승려와 문도를 성격에 따라 구분한 좋은 예를 보여주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