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6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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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山寺 |
영어의미역 | Geumsansa Temple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기관 단체/사찰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모악15길 1]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서홍식 |
성격 | 사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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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연도/일시 | 599년 |
전화 | 063-548-4441~2 |
팩스 | 063-548-1390 |
홈페이지 | 금산사(http://www.geumsansa.org) |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개설]
금산사(金山寺)는 전라북도의 최대 사찰로 여러 가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 창건에 관해서도 많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지만 『금산사지』를 근거로 백제 법왕 때 창건한 사찰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오랜 세월을 지내온 동안 수많은 고승을 배출하면서 불교계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해 온 유서 깊은 사찰이다.
[건립경위 및 변천]
금산사는 진표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그것은 진표율사가 신라 오교(五敎) 가운데 하나인 법상종의 근본 도량으로 이룩해 놓았고 미륵전 등 수많은 불전을 세운 승려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1884년(고종 21) 나기익(羅基翊)이 편찬한 『김제읍지』 등에는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진표 이전부터 금산사가 존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43년 김영수(金暎遂)가 펴낸 『금산사지』에 의하면 599년(법왕 1) 왕실의 자복사(資福寺)로 개대(開垈)되었다고 초창 연대를 밝히고 있다. 또 “초창 당시의 사양(寺樣)은 소규모로 대가람의 면모를 형성하지 못하였다가 762년(경덕왕 21) 진표율사가 개창에 착수하여 766년(혜공왕 2) 대사찰로서 면모를 갖추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의 설명을 종합하면 금산사는 진표율사 이전에 초창되었으며 진표율사에 의해서 그 면모가 일신되었고, 견훤의 후백제 왕실과 밀착되어 크게 번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중창은 혜덕왕사가 여러 건물을 신축함과 동시에 이전의 당우를 크게 중수하였고, 선조 때 정유재란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자 1601년(선조 34)부터 1635년(인조 13)까지 약 35년에 걸쳐 수문대사 등이 재건하였다. 그리고 고종 연간에 용명화상이 미륵전 등 다수의 건물을 중수하였고, 1934년 황성열 주지가 주요 건물에 대한 보수를 했다. 이처럼 여러 차례 중수와 신축을 거듭하여 왔지만 지금의 금산사는 선조 이전의 모습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이는 정유재란 이전 금산사의 규모를 말해 주는 1635년 편찬된 『금산사사적』을 통하여 알 수 있는데, 이 글에 의하면 금산사 경내는 크게 대사구·봉천원구·광교원구 등 3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총 80여 채가 넘는 건물이 있었다. 그리고 산내 암자만도 40여 개가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유재란 후 경내의 건물 가운데 수문대사에 의해 재건된 건물은 3구역 중 대사구의 일부만 건립되었으며 나머지는 지금까지 복구되지 못하고 있다.
금산사가 웅장한 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진표율사의 힘이 컸다. 그런 이유로 진표율사를 금산사의 개산조(開山祖)라 부른다. 진표율사는 12세 때 금산사의 순제법사에게 입문하여 수도하던 중 스승으로부터 미륵(彌勒)과 지장(地藏) 두 성인 앞에 나아가 참회하며 계법을 구하라는 명을 받았다. 27세가 되던 해 보안현(保安縣)의 변산(邊山) 불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가 신명을 바쳐 수도에 정진하면서 계법을 구하였다.
이에 감동한 지장과 미륵 두 보살은 진표에게 각각 계본(戒本)과 목간자(木簡子)를 내려 주었다. 두 보살로부터 교법을 전해 받은 진표율사는 산을 내려와 금산사를 중창하고 미륵장륙상(彌勒丈六像)을 주상하여 미륵전 내에 주존(主尊)으로 봉안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머물러 중생을 교화하면서 하나의 교단을 형성해 나갔다. 이 종파를 법상종(法相宗)이라고 하는데 유가종·유식종·자은종으로도 부른다.
진표율사 이후 금산사의 대표적인 승려 중 첫째로는 고려 문종 때의 혜덕왕사[1038~1095]이다. 혜덕의 속성은 이(李)씨이고, 이름은 소현(韶顯)이다. 11세 때 입산하여 해안사의 고승 해인국사의 제자가 되었다. 1061년(문종 15) 왕윤사에 실시된 오교대선(五敎大選)에 합격하여 대덕의 법계를 받았다. 그 후 1069년(문종 23)에 중대사, 1071년에 삼중대사가 되었으며 1083년에는 수좌(首座)와 승통(僧統)의 자리에 올랐다.
혜덕왕사는 여러 사찰의 주지도 역임했는데 1079년(문종 33)에는 금산사의 주지로 취임하였다. 주지로 있으면서 절 남쪽에 광교원을 창건하여 규기(窺基)가 선술(選述)한 『법화현찬(法華玄贊)』, 『유식술기(唯識述記)』 등 장소(章疏) 32부 353권을 교정 개간(開刊)하였다. 1095년(숙종 즉위년) 금산사의 봉천원에서 귀적하니 왕이 그에게 시호를 내려주었다. 혜덕왕사가 입적한 후 금산사의 주지가 된 사람은 도생승통(道生僧統)이었다. 도생승통은 문종의 여섯 번째 아들이자,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동생이다.
금산사에서 배출된 고려시대의 고승으로는 원명대사[1262~1330]를 꼽을 수 있다. 속성은 조(趙)씨이고 이름은 해원인데, 12세에 출가하여 금산사 석광법사의 제자가 되었다. 원명대사의 승명이 널리 알려지자 원나라에서 그를 초청하여 숭은복원사의 제1세 주지로 삼았다. 1328년 충숙왕은 그를 금산사의 주지로 임명하기 위하여 원나라 황제에게 원명대사를 본국으로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귀국하게 된 원명대사는 한동안 금산사 주지로 머물면서 당우를 중창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긴 후 다시 원나라 숭은복원사에 돌아가 그곳에서 귀적하였다. 조선시대의 고승으로는 먼저 뇌묵대사를 들 수 있다. 그는 20여 세에 금산사에 입문하였고, 후에 서산대사에게 조계(曹溪)의 선지(禪旨)를 전수받았다. 임진왜란 때는 금산사에서 승병 1,000여 명을 모집하여 거의부전(擧義赴戰)하니 조정에서 총섭(總攝)으로 임명하였다. 후에 조정에서 공로를 보상하여 국일도대선사부종수교보광현랑뇌묵(國一都大禪師扶宗樹敎葆光玄郞雷默)이라는 법호를 내려주었다.
다른 고승으로는 남악선사가 있다. 서산대사의 6세 법손으로 법명은 태우(泰宇), 호는 남악당(南岳堂)이다. 처음 지산(智山)의 용문사에서 득도하였으며 쌍봉사 쟁원선사, 월담사 운제선사, 직지사 모운대사 등에게 법을 전수받았다. 1725년(영조 1) 남악선사가 금산사에서 화엄대법회를 개강하였을 때 수업을 듣는 학생이 1,400여 명에 달할 만큼 성회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고려 충렬왕 때의 효정승통(孝禎僧統), 조선 선조 때의 소요선사, 숙종 때의 환성선사 같은 고승들이 금산사와 관련을 맺고 있다.
[현황]
금산사의 말사로 김제시의 귀신사·망해사·문수사·청룡사·학선암·흥복사, 무주군에 관음사·백련사·북고사·안국사·원통사, 완주군에 단암사·대원사·송광사·안수사·안심사·옥련암·원각사·원등사·위봉사·정수사·학림사·화암사, 진안군에 고림사·금당사·옥천암·천황사가 있다. 군산시에 불지사·상주사·은적사, 전주시에 극락암·금선암·남고사·법우사·서고사·자하원 포교당·진북사·천고사·칠성사·학소암, 남원시에 귀정사·대복사·덕음사·선국사·선원사·실상사, 익산시에 관음사·남원사·문수사·백운사·법성사·사자암·숭림사·심곡사·연국사·자명사, 장수군에 신광사·영월암·팔성사, 대전광역시에 죽림정사 등이 있다.
[관련 문화재]
김제 금산사 일원은 2008년 12월 18일 사적 제496호로 지정되었다. 금산사에는 국보 1점과 보물 10점 등 총 11점의 지정 문화재가 있다. 국보로는 제62호 금산사 미륵전(金山寺彌勒殿)이 있다. 보물로는 제22호 금산사 노주(金山寺露柱), 제23호 금산사 석련대(金山寺石蓮臺), 제24호 금산사 혜덕왕사진응탑비(金山寺慧德王師眞應塔碑), 제25호 금산사 오층석탑(金山寺五層石塔), 제26호 금산사 석종(金山寺石鐘), 제27호 금산사 육각다층석탑(金山寺六角多層石塔), 제28호 금산사 당간지주(金山寺幢竿支柱), 제29호 금산사 심원암 북강삼층석탑(金山寺深源庵北崗三層石塔), 제828호 금산사 석등(金山寺石燈), 제827호 금산사 대장전(金山寺大藏殿)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