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6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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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海鶴李沂先生生家 |
영어의미역 | Born House of Haehak Yi Gi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 340-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남해경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3년 12월 26일 - 해학이기선생생가 전라북도 기념물 제118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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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해학이기선생생가 전라북도 기념물 재지정 |
성격 | 고가 |
양식 | 초가 |
건립시기/일시 | 19세기 |
정면칸수 | 4칸 |
측면칸수 | 2칸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 340-1 |
소유자 | 이정환 |
문화재 지정번호 | 전라북도 기념물 |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에 있는 해학 이기의 생가.
[개설]
이기(李沂)[1848~1909]는 황현(黃玹)·이정직(李定稷)과 함께 호남 3절로 불렸으며, 유형원(柳馨遠)[1622~1673]·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학풍을 이어받은 조선 말 실학자이자 항일 독립투사이다. 1894년(고종 31)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전봉준(全琫準)[1855~1895]을 찾아가 동학군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려 하였으나 김개남(金開男)[1853~1895]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1905년(고종 42)에는 동경(東京)에 가서 천황과 요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침략을 항의하였으며, 을사조약 후 귀국하여 한성사범학교에서 재직하는 한편 장지연(張志淵)[1864~1921]·문효정 등과 대한자강회를 결성하여 민중 계몽과 항일운동에 전력하였다. 1907년(순종 1)에는 나인영(羅寅永) 등과 같이 자신회를 조직하여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의 암살을 기도하였으나 권중현(權重顯)[1854~1934]에게 부상만 입혔을 뿐 실패하였다.
7년 유배형으로 진도에 갔다가 고종의 특사로 귀향하였고, 돌아온 후에도 다시 서울에서 『호남학보』를 발간하며 민족운동에 헌신하던 중 1909년(순종 3) 병사하였다. 묘소는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에 있다가 국립묘지로 이장하였다.
[위치]
김제 시내에서 만경 방향으로 지방도를 따라 약 10여 분 가다 보면 좌측으로 해학이기선생생가 이정표가 보인다.
[변천]
해학이기선생생가는 조선 후기에 건립되었다. 원래 안채 1동과 사랑채 1동의 초가집이었으나, 훼손되어 최근 신축하면서 안채를 정면 4칸, 측면 2칸의 초가로 복원하였다.
[형태]
해학이기선생생가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초가집이다. 중앙에 있는 2칸의 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 1칸의 부엌이 있고, 마루 뒤에는 안방이 있으며 우측에 건넌방이 있다. 구조는 낮은 기단 위에 방형에 가까운 덤벙주초를 놓고 방형 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도리·보와 결구하고 초가를 얹었다.
[현황]
해학이기선생생가는 2003년 12월 26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118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현재 이정환이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