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5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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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深浦里傳牧場址 |
영어의미역 | Stock Farm Site in Simpo-ri |
이칭/별칭 | 심포리 전 목장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1231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문이화 |
성격 | 목장 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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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건물 건립시기/일시 | 고려시대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1231 |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 있는 고려시대 목장 터.
[개설]
조선 후기 대동법이 시행되기 전에는 고을마다 집집마다 일정한 양의 특산물을 조정에 납부하는 공납제가 시행되었다. 이러한 공납제는 지역적인 환경과 여건을 고려하여 조정과 왕실이 필요로 하는 물품을 조달한다는 목적 아래 시행되었으나, 이를 납부해야 하는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토지세나 인력세보다 부담이 커서 고향을 떠나는 경우까지 발생하였다.
특히 왕조 말기에 이르러 국가의 기강이 흔들리면서 조세의 부과는 형평성을 잃게 되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백성들이 떠안게 되었다.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남상마을 일대라고 전해지고 있는 고려시대의 목장 터는 현재 그 흔적을 거의 찾아 볼 수 없지만, 인근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 실상이 어떠하였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변천]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 남상마을에는 해마다 공마(貢馬)라는 이름의 말 300필을 나라에 바쳐야 하는 과중한 세금이 부과되었는데, 그 어려움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인력 동원이나 말을 구입하는 재정상의 문제 등으로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조선 초기 태조 말년에 와서야 이러한 부담이 풀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조선 태조 때의 성리학자 강원기(康元紀)에 의해서 실현되었다. 전형적인 성리학자였던 강원기는 벼슬을 마다하고 후진 양성에만 몰두하던 중 조선 초 진봉면 심포리로 낙향하였다. 어느 날 강원기의 제자였던 이지로(李芝老)가 전라감사로 부임하면서 강원기를 찾아왔는데, 이 때 강원기가 이지로에게 지방 실정을 이야기함으로써 말을 기르는 것을 제주도로 옮겨가게 되었다고 한다.
[위치]
현재 목장 터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주변으로 넓은 논이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일대로 추정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심포리 전 목장지는 현재 그 터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고 인멸되었지만, 현재까지 주민들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당시의 실상을 통해 역사의 단면을 고스란히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