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5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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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烽燧 |
영어의미역 | Signal-fir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
집필자 | 문이화 |
[정의]
조선시대 전라북도 김제 지역에 있었던 불과 연기를 이용한 통신 수단.
[개설]
봉수는 국경 변방의 긴급한 상황을 중앙 또는 다른 지역의 변경에 알리기 위해 설치한 통신 수단으로,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였다. 외부로부터 적이 침입하였을 때에는 외적과의 격전지 역할을 하였다. 봉수대는 수십 리마다 눈에 잘 띄는 산꼭대기에 설치하여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보냈는데, 평상시에는 1개의 횃불로 신호를 보내다가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3개, 국경을 침범하면 4개, 전투가 벌어지면 5개의 횃불로 신호를 보냈다.
봉수는 주요선인 직봉(直烽)과 보조선인 간봉(間烽)이 있다. 직봉은 동북쪽으로는 경흥, 동남쪽으로는 동래를 기점으로 하였고, 서북의 내륙 지방은 강계, 해안 지방은 의주, 서남쪽으로는 순천을 각각 기점으로 하였으며, 종착점은 서울 목멱산(木覓山)[남산]이었다. 간봉은 전선의 초소로부터 직봉선 사이사이에 중간 역할을 하는 것과, 전선에서 직접 본진(本鎭)이나 본읍(本邑)에 이르는 단거리에 해당하는 것이 있었다.
[관련 기록]
김제 지역의 봉수대와 관련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여지도서(輿地圖書)』·『대동지지(大東地志)』·『금구읍지(金溝邑誌)』 등에 있다. 이 문헌들에 기록된 내용은 거의 비슷한데, 심포리 길곶 봉수대와 선암리 봉두산 봉수대에 대한 것이다.
[현황]
전라북도 김제시 지역에는 심포리 길곶 봉수대와 선암리 봉두산 봉수대 2곳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현재에도 이 두 곳에 봉수대 흔적이 남아 있다. 심포리 길곶 봉수대는 『신증동국여지승람』권34 만경봉수조에 “길곶 봉수는 현의 서쪽 29리에 있는데, 남쪽으로는 부안현 계화도에, 북쪽으로는 옥구현 사자암에 응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부안현 계화도와 옥구현 사자암으로 봉화가 전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심포리 길곶 봉수대의 위치는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 사이로 황해에 고개를 내민 듯한 진봉면의 끝 봉화산[해발 84m] 정상에 있는데, 지금은 원형이 남아 있지 않지만 봉수대 축조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자연 석재들이 직경 10m에 걸쳐 무덤처럼 쌓여 있다. 그 중에는 불에 그을린 흔적이 있는 돌들이 상당수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조선 전기부터 이곳에서 봉화를 올려 신호를 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선암리 봉두산 봉수대는 김제시 금구면 선암리 봉두산 정상에 위치한 봉수대로서, 『금구읍지』에서는 단지 “남산에 불을 피웠다.”고만 전해지고 있어서, 읍지에서 말하는 ‘남산 봉수’가 선암리 봉두산 봉수대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좀 더 살펴보아야 한다. 하지만 금구면이 금구현이었을 때 현의 중심이 당월마을이었고, 당월마을의 남측에 봉두산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읍지에서 말하는 ‘남산’이 지금의 봉두산일 가능성이 높다.
선암리 봉두산 봉수대는 금구산성이 있는 봉두산의 정상부에 형성되어 있는 직경 10m 정도의 원형 평지가 봉수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원형의 평지는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으로 보이며, 주변에 산재한 석재들이 인위적으로 조성된 평지와 관련된 봉수대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봉수는 과거 우리 조상들이 위기 상황을 맞이하여 대처하였던 과학적인 대처법의 하나이다. 김제 지역의 봉수대, 즉 길곶 봉수대와 선암리 봉두산 봉수대는 조선시대 김제 지역이 군사 방위상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사면이 모두 평지로 둘러싸인 김제는 봉수대를 통한 효율적 통신 이용이 가능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