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563 |
---|---|
한자 | 鳳月里-窯址 |
영어의미역 | Kiln Site in Bongwol-ri |
이칭/별칭 | 봉월리 기와가마 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황산면 봉월리 산48-1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문이화 |
성격 | 가마터 |
---|---|
원건물 건립시기/일시 | 통일신라시대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김제시 황산면 봉월리 산48-1 |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황산면 봉월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기와 가마터.
[개설]
봉월리 기와요지는 가마터에서 출토되는 암키와와 수키와 등의 기와와 토기편 등 유물 현황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되어 인근 지역에 기와를 공급해 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위치]
봉월리 기와요지는 해발 40m 정도의 구릉성 야산이 대체로 동서로 뻗어 있는 동측 사면 말단부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으로는 저평한 구릉성 야산과 곡간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남측으로는 해발 60m 정도의 고산(高山)이 자리하고 그 말단부로는 10년 전에 소나무를 비롯한 다양한 수목으로 구성된 묘목밭이 조성되어 있다. 이 묘목밭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지표면이 정지되었거나 묘목을 이식하는 과정에서 깊게는 2~3m 정도로 파헤쳐져 있는데, 일부 지역은 관리가 소홀하여 잡목과 초목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 300m 거리의 서남편으로는 매산이라는 이름의 제방과 쌍감리 유물산포지(雙坎里遺物散布地)가 위치하고 있으며, 동남편으로 쌍감리 유적(雙坎里遺蹟)이 위치하고 있다.
[발굴조사경위 및 결과]
봉월리 기와요지는 김제황산골프장 부지에 대한 지표조사 과정에서 발견된 유적이다. 당시 해발 40m의 나지막한 구릉성 야산의 동측 절개지에서 소성실(燒成室)이 노출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폭 110㎝, 높이 65㎝ 정도의 요상과 벽체가 반원형으로 남아 있었다. 또한 아치형의 윤곽선이 확인되었으나 지표상에서 유물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정확한 성격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전조사 결과 백제 토기 등이 확인되어 2002년 5월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 의해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소성실과 배연구 등 비교적 잔존 상태가 양호한 가마 1기가 조사되었다. 가마는 지하식 구조로 조성된 등요(登窯)로 연소실과 소성실, 배연구로 구분되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연소실은 사면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데다 이미 파괴되어 소실된 상태여서 확인이 불가하여 자세한 구조는 알 수 없다. 소성실은 천장부가 아치형으로 거의 대부분 잔존하며, 바닥의 형태는 양 끝부분이 약간 좁아지는 장타원형을 띠었다. 배연구는 소성실 끝부분에서 중앙부로 연결되어 수직으로 1개가 설치되었다.
소성실 단면에서는 아치형의 소결토로 단단하게 이루어진 천장과 바닥이 노출되었으며, 그 주변은 화기에 닿아 붉게 그을려 있었다. 그리고 내부에는 명갈색 사질점토[풍화암반토]가 교란되지 않고 고스란히 단일층을 이루어 퇴적되어 있었다. 출토 유물로는 소성실과 배연구에서 암키와편과 수키와편이 다량 발견되었으며, 이외에도 완(盌)과 대발, 연질토기 구연부, 경질토기 동체부편 등 약간의 토기편이 수습되었다.
[현황]
현재 봉월리 기와요지 아래가 밭으로 개간되면서 1m 이상 절개되어 있으며, 남동사면을 따라 완사면을 이루고 있다.
[의의와 평가]
봉월리 기와요지와 같은 통일신라시대 와요지는 호남 지역에서는 아직 조사된 예가 없어 구체적인 비교 검토를 하는 데는 어려운 점이 있다. 다만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조사된 통일신라시대 기와요지에 비하여 봉월리 기와요지는 소성실 바닥면의 경사도가 낮은 편으로, 고화도에 양호한 기와를 굽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나 소성실과 배연구의 시설 방법이 부여 정암리 백제 7호·8호 요지와 유사한 구조를 보이고 있어 앞 시대인 백제 와요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은 것으로 추정됨에 따라, 이 지역이 백제시대 혹은 통일신라시대 기와의 조성 경위를 추정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