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4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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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花郞會義擧 |
영어의미역 | Hwaranghoe Accident Against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창섭 |
[정의]
일제강점기 이리농림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화랑회가 전라북도 김제 지역에서 일제에 대항하여 무장 투쟁을 벌이려던 사건.
[역사적 배경]
일제강점기 일본의 압제에 항거하는 학생들의 투쟁은 광주학생운동 등 여러 가지 사건으로 나타났고, 일제 패망이 임박하여 조선인의 독립 투쟁에 대한 폭압적인 탄압이 계속되었음에도 학생들의 민족의식과 투쟁심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목적]
1943년 이리농림학교에서 결성된 비밀 결사 화랑회는 일제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기 위한 조직으로, 무장 투쟁을 통해 조선의 광복에 기여하려 하였다. 이들은 총기 및 폭약 등을 탈취하여 무장한 뒤 주재소 및 경찰서를 습격하고, 일제가 김제 지역에서 수탈한 물품을 운반하는 주요 경로인 목천교를 폭파함으로써 수탈을 방해하려고 하였다.
[발단]
1943년 이리농림학교 2학년생 이상운(李相云)은 동급생인 장지환(張志煥)·김구(金九)·호중기(扈仲基)·김영준(金英俊)과 1학년생 서기용(徐基容)·박기춘(朴基春)·강동석(姜東錫)을 규합하여 화랑회를 조직하였다. 화랑회에 협조하는 관련 조직으로는 김직수(金直洙), 임백상(林伯相), 김환용(金煥容), 장이규(張二圭) 등이 속한 사민단(事民團)이 있었다.
화랑회는 1943년 5월 11일 밤 11시에 지금의 금구면 오봉리에 있는 고깔봉의 일본군 탄약고에서 폭약을 탈취하여 금구주재소를 습격하고 무기를 빼앗은 뒤 김제경찰서를 습격하여 무기를 보강한 다음 만경강 위의 목천교를 폭파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경과]
화랑회 회원들과 금구 출신으로 계획을 입안한 장이규를 비롯한 극소수만 참여한 데다 인근 광산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 전주도경과 김제경철서 형사대가 급파되어 비상경계를 펴고 있었던 탓에 거사는 실행되지 못했다.
[결과]
화랑회 조직이 발각되어 1945년 4월 1일 회원들이 체포되었다. 일제는 구류 기간을 연장하며 고문 수사를 벌여 이상운은 1945년 7월 17일 사망하였고, 다른 회원들은 빈사 상태에 빠진 채 공판을 기다리다가 8·15를 맞아 석방되었다. 1991년 정부에서 이상운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의의와 평가]
화랑회 의거는 일본이 패망에 임박할 때까지 끝없이 이어져 오던 김제 지역 학생들의 독립 정신이 분명히 나타난 사건으로 광복을 앞당기는 데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