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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484
한자 東學農民運動
영어의미역 Donghak Peasant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백덕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농민운동|사회운동|민중항쟁
발생(시작)연도/일시 1894년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894년
발생(시작)장소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원평 지도보기
관련인물/단체 김덕명

[정의]

1894년 전라북도 김제 지역에서 일어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반외세 농민항쟁.

[역사적 배경]

19세기는 순조·헌종·철종 등 어린 왕들이 연이어 즉위하면서 외척 세력에 의해 권력이 독점되는 세도정치의 시기였다. 그로 인하여 중앙 정치는 문란해지고, 탐관오리는 백성들을 핍박했으며, 전정·군정·환곡 등의 폐단으로 민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경주 출신의 몰락 양반 최제우(崔濟愚)가 1860년 서학[천주교]에 대항하여 동학을 창시하였는데, 핵심 내용은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것이었다. 평등사상을 제시한 동학은 착취와 불평등의 대상이었던 농민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지배층에게는 유교적 질서를 뒤흔드는 불온사상으로 여겨졌다.

[목적]

동학농민운동의 목적은 동학교도들이 중심이 되었던 초기에는 교조신원(敎祖伸寃)과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보장받고자 하는 종교적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보은집회와 금구 원평집회 이후 1차 봉기가 일어날 무렵에는 동학농민군이 주장했던 폐정 개혁안에서 드러나듯이 정치적·사회적·경제적 모순의 총체적 철폐를 주장하였다. 그러다가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점령당하고, 나아가 내정간섭을 해오자 척왜(斥倭)를 제창하는 등 반외세적 성격이 강해졌다.

[발단]

동학농민운동의 발단이 된 사건 가운데에는 먼저 교조신원운동 시기에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가 억울하게 처형된 것을 들 수 있다. 이후 고부민란의 시기에는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가렴주구(苛斂誅求) 등의 횡포가 있었고, 이에 항거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 전주성을 점령했던 1차 봉기 시기에는 안핵사 이용태(李容泰)가 동학군에 대한 가혹한 탄압이 발단이 되었고,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 개혁안이 실천되던 시기에는 전주화약을 맺은 것이 발단이 되었다. 2차 봉기가 일어나 우금치전투와 원평전투가 일어났던 시기에는 일본의 경복궁 점령과 내정간섭이 발단이 되었다.

[경과]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가 처형되자, 그 억울함을 벗고 동학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동학교단 중심으로 교조신원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893년 교조신원운동 당시 전라도의 집회가 바로 원평장터에서 있었다. 이때 전봉준(全琫準)이 중심이 되어 1만 여 명이 집회를 열었다. 이는 외세를 몰아내고자 북상까지 계획했던 급진적 성향이 두드러진 강경 세력의 집회였으며 고부(古阜) 봉기의 도화선이 된 집회였다. 따라서 김제의 원평장터는 동학농민운동의 주요 진원지였다.

원평장터의 집회와 더불어 고부군수인 조병갑(趙秉甲)의 지나친 탄압에 항거하여 일어난 고부 봉기는 일시에 전라도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고부 농민들은 전봉준(全奉準)을 영도자로 삼아 관(官)을 응징할 것을 결의하였다. 전봉준은 농민 1천여 명을 거느리고 고부 관아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고 수세미(收稅米)를 농민에게 돌려주고 해산하였다. 그러나 사태 수습을 맡은 관리들이 수습책은 마련하지 않고 오히려 농민들을 더욱 심하게 탄압하여 자극함으로써 고부민란은 곧 전국적인 농민 혁명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1894년 1월 10일에는 전봉준·김도삼(金道三)·정익서(鄭益瑞) 등의 주도로 온갖 폭정을 저지른 고부군수 조병갑을 몰아내고 수탈의 대상이었던 만석보(萬石洑)를 허물었던 1차 봉기가 있었다.

이에 고부 농민봉기를 수습하고 진정시키기 위해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가 가혹한 탄압을 하자 1894년 3월 20일 봉기는 전면적으로 확산되었다. 무장에서 전면적으로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4월 7일 황토재에서 전라감영군을 격파하고, 흥덕·고창·무장·영광·함평을 차례로 점령하였으며, 4월 27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1894년 5월 동학군은 고부, 태인, 부안, 김제, 금구, 정읍, 고창 등을 거쳐 충청도 일부 지역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이중 김제 금구는 관군 측에서나 동학 농민군 측에서 볼 때 아주 중요한 요새지였다. 김제, 만경, 부안, 고부, 태인 등에서 전주성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금구성을 통과해야만 했다. 같은 해 6월 전봉준은 동학교도들을 중심으로 각처에 집강소를 설치하는 한편 원평에 주재하면서 전라북도를 관할하였다.

5월 7일에는 전주화약이 맺어지고 다음날 자진 해산하였는데, 이 전주화약을 계기로 동학농민군들은 각자의 고을로 돌아가 폐정 개혁을 단행하기 위한 기관으로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이때 김제 지역에는 금산면 원평에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이 시기에 전라도의 동학농민군은 크게 3개 지역으로 갈라져 있었는데, 전봉준은 수천 명의 동학교도를 거느리고 금구·원평을 중심으로 전라우도를 관할하였고, 김개남(金開男)은 남원을 근거지로 하여 전라좌도를 관할했으며, 손화중(孫華仲)은 광주 일대를 관할하였다. 특히 원평에는 2차 봉기를 단행하던 무렵에 전라도 전체 집강소를 통괄하던 대도소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동학군의 전주성 점령으로 다급해진 정부가 청(淸)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일본도 자국민 보호를 구실로 한국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에 동학교도들이 10월에 삼례에서 회의를 열고 항일 구국을 기치로 전국적인 봉기에 돌입했으며 당시 김제 김봉연, 원평 송태섭, 금구 김봉득은 동학 농민군 5천여 명을 이끌고 참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봉준은 공주와 논산에서 연이어 패전하면서 패잔병 3천명을 거느리고 11월 23일 금구, 원평으로 후퇴하였고 관군과 일본군도 전주 입성에 이어 동학 농민군을 뒤를 쫓아 금구, 원평으로 추격해왔다.

전라도 각지를 돌며 집강소의 운영을 독려하던 전봉준은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유린하자 9월 12일경 삼례에서 재기포가 이루어져 서울을 향해 북상하였다. 이때 1차 무장기포 단계에서는 참여하지 않았던 충청·강원·경기·경상도 북부 지역도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논산의 전봉준과 합류하였다. 이 연합 동학농민군은 서울로 북상하기 위해 충청 지역을 향해 진군하였다.

동학농민군이 공주 우금치를 넘어갈 무렵 관군과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저지하기 위해 우금치 일대에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전투에서 절대적 무기의 열세로 농민군은 커다란 타격을 입고 패하여 논산으로 후퇴하였다가, 전주, 태인을 거쳐 금구, 원평까지 후퇴하였다. 원평까지 후퇴한 전봉준은 순창에 몸을 숨기고, 김덕명(金德明), 최경선(崔景善) 등과 후일을 기약하였으나 정부군에 붙잡힘으로써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농민군은 11월 15일에 논산 황화대에서, 11월 25일에는 금산 원평 일대에서 끈질긴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원평에서 동학군과 정부군·일본군 간의 전투가 아침부터 오후까지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특히 구미란 전투는 사실상 동학군 최후의 항전이었다. 결국 화력의 차이로 원평구미란 전투에서 패한 동학군은 태인으로 퇴각하였고 전봉준을 비롯한 영도 인물들이 관군에 피체됨에 따라 1894년 12월을 고비로 동학군의 예기는 꺾이고 말았다.

[결과]

동학농민운동은 반봉건적·반외세 성격의 운동으로서 반봉건적 성격은 갑오개혁에 영향을 미쳤으며 전통 질서 붕괴를 촉진하였다. 또한 반외세 성격은 동학 농민군의 잔여 세력이 의병운동에 가담함으로써 독립운동 및 항일구국운동에 기여하게 되었다. 한편 최제우가 창건한 동학을 제3대 교주 손병희(孫秉熙)가 1905년에 천도교로 개칭하여 인격적이며 초월적인 유일신 한울님을 신앙 대상으로 하여 천인합일(天人合一), 인내천 사상과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을 바탕으로 종교적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당시 김제 지역 출신으로 동학농민군에 가담하였던 인물 중 김제의 송태섭(宋台燮), 송양광(宋良光), 김경수(金景秀), 주문상(朱文尙), 장화숙(張化淑), 강문숙(姜文淑), 황경삼(黃敬三), 김막동(金莫童), 금구의 김염한(金鹽漢), 김덕명, 김방숙(金方淑), 만경의 박도원(朴道源), 임도원(任道元), 진우범(陳禹範), 김○○[접주], 진성서(陳聖瑞), 정보경(鄭甫景) 등에게는 체포령이 내려졌다.

또한, 김제의 강명선(姜明善) 등 6명, 금구의 김인배(金仁培), 김제국(金濟局), 송대경(宋大敬), 이경화(李敬化), 김덕원(金德元), 김우경(金右京) 등과 만경의 진원필(陳元弼), 박봉실(朴奉實), 홍인영(洪仁永), 곽자덕(郭子德), 손판구(孫判九), 김원봉(金元奉), 노순익(奴順益), 노석구(奴石九) 등 많은 이들이 붙잡혀 형을 살았다. 금구김덕명원평, 태인 전투를 끝으로 원평에 은거하다 붙잡혀 1895년 3월 재판을 받고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성두환 등과 함께 사형에 처해졌다.

[의의와 평가]

갑신정변이 민중이 배제된 사건이었다면, 동학농민운동은 민중이 중심이 된 아래로부터의 개혁운동이었다. 동학은 전근대적 모순과 부패의 척결, 즉 근대적 사회 개혁을 요구하고 집강소를 중심으로 실행해 갔다. 이는 집권층 중심의 역사에서 민중 중심의 역사로 전환되어 가는 첫 신호탄이라는 데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특히 김제 지역이 동학의 전 과정에 걸쳐 중심 무대가 되었다는 것은 의의가 크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섻******* 갑자기 이글을 보니 서민들을 위해 열렬히 투쟁하시던 그분이 떠오르네요M..M.MB.... MBC!! game out!! 2011.10.06
손** 김덕명장군 추모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11.05.27
손** 꾀좋네 ㅋㅋㅋㅋ 완전쩔어 2011.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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