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4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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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立石院 |
영어음역 | Yiseokw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백덕규 |
[정의]
고려시대부터 개항기까지 전라북도 김제 지역에 설치된 국영 숙식 시설.
[개설]
원(院)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공무로 여행하는 관원에게 숙식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각 요로(要路)와 인가가 드문 곳에 설치한 국영 숙식 시설로, 설치 시기 및 운영 방법 등은 확실하지 않다. 각 주(州)·현(縣) 내의 관(館)과는 구별된다. 건물은 원우(院宇)라고 했다. 원은 지방 통치와 교통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고려시대에는 원이 사원에 부속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서로 동일시되기도 했으며, 승려들이 관리하기도 했다. 이러한 원들은 주로 교통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어 교역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제정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의 원우는 고려시대의 사원 또는 선원(禪院)이 전환되거나, 개인 소유의 주택 또는 누정(樓亭)을 개조한 것이 많았다. 관가 또는 개인이 주관해 원우를 신축하는 경우도 있었다. 원은 공무를 수행하는 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으나 대부분 상고(商賈)나 여행자의 숙식소로 존재했다. 또한 국왕이 지방을 순시할 때나 피난길에 이용되기도 했다. 각도 관찰사가 도내 여러 고을을 순행할 때 원에서 점심을 먹거나 마필(馬匹)을 교체하기도 했다.
[관련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전하는 초기 전국의 원은 1,310개소로 한성부 4, 개성부 6, 경기도 117, 충청도 212, 경상도 468, 전라도 245, 황해도 79, 강원도 63, 함경도 37, 평안도 79개소에 이르렀다. 김제 지역 역원의 위치를 김제군·만경현·금구현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제군 관하에는 동원(東院)[재군동 2리 1개소, 지금의 김제시 신풍동 소식골], 원기[재군서 30리, 지금의 김제시 죽산면 서포리 원터], 금구현에는 홍인원(弘仁院)[재현남 15리, 지금의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소복원(蘇復院)[재현서 5리, 지금의 김제시 금구면 옥성리], 청도원[지금의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감물천원(甘勿川院)[재현북 6리, 지금의 김제시 금구면 금구리], 잠류원(潛流院)[재현남 6리, 지금의 김제시 금구면 용복리], 만경현에는 입석원(立石院)[재현남 10리 1개소, 지금의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 등이 있었다.
[내용]
입석원은 동쪽으로는 김제와 전주, 남쪽으로는 부안, 그리고 북쪽으로 군산 및 익산과 인접해 있다. 만경현에서 부안·군산·익산·김제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묵었던 원으로, 정확한 개설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비교적 오래 전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입석원은 1895년(고종 32)에 역원제가 폐지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현황]
입석원은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에 해당되며, 조선시대 만경현의 남쪽 10리 지점에 위치해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을 알아보기 어렵다.
[의의와 평가]
입석원은 김제·군산·익산·정읍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교통의 요지에 위치해 있어 공무로 여행하는 자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역(驛)과 함께 육상 교통 기능 가운데 중요한 몫을 차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