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4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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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壬辰倭亂 |
영어의미역 | Japanese Invasion of Korea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백덕규 |
[정의]
전라북도 김제 지역에서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
[개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왜군의 침략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은 초기에는 왜군의 일방적인 북상이 계속되었다. 풍부한 전쟁 경험과 조총으로 무장한 대규모 왜군은 당일에 부산성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같은 해 5월 2일에 한양을 함락시키기에 이르렀다. 침공한 지 20여 일 만에 한양을 함락시켰다는 것은 왜군이 한양에 이르기까지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임진왜란]
왜군의 침략 이후 전세는 조선에 완전히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때 호남 방어의 중책을 띠고 김제군수로 부임하였던 정담(鄭湛)은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黃璞)과 함께 웅치[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에서 수많은 왜군들을 물리쳤으나, 이튿날 왜군이 전 병력을 동원해 전면 공격을 감행하자, 제1·2선을 지켰던 황박과 이복남이 전사하고, 제3선을 지키던 정담은 화살이 다하도록 최후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
왜군은 비록 적군이었지만 정담의 충절에 감명 받아 웅치전투에서 전사한 조선군의 시체를 모아 길가에 큰 무덤을 만들어 그 위에 ‘조조선국충의간담(弔朝鮮國忠義肝膽)’ 즉, “조선국의 충신과 의사(義士)들의 간담(肝膽)을 조상(弔喪)하노라.”라는 뜻의 팻말을 세워 그 넋을 위로하였다. 왜군은 웅치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많은 희생자와 큰 타격을 입고 전주성 주위를 맴돌다가 물러갔다. 이는 김제군수 정담 장군이 최후까지 항전한 결과였다.
[정유재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김제 지역의 전투를 오늘날과 같은 행정구역 개념으로 알아보는 것은 곤란하다. 예컨대 금구현이나 만경현에서 전투가 일어났다면 그것은 김제를 거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때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김제 지역 전체를 언급할 수밖에 없다. 1597년 2월 왜군이 재침해 오자 전라도 지방도 그 침략을 받게 되었다. 그 원인은 남해안을 수비하던 이순신이 모함을 당하여 물러나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왜군에게 참패를 당하여 제해권(制海權)을 빼앗긴 데 있었다.
또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왜군은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완전 점령을 전략으로 하여 전주를 점령한 후 북진할 계획을 세웠다. 남원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전주성에 총집결하였는데 남원성이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전주성은 크게 동요하였다. 그런데다가 명나라 장군 진우충(陣愚衷)이 우리 병사를 죽이자 명군에 대한 성민(城民)의 분노가 대단히 커졌다. 평소의 명나라 군대와 차별 대우를 받아온 불만이 폭발한데다가 성내 창고 방화의 변을 당하자 명나라의 장군 진우충은 도주해 버렸다. 이리하여 영병(營兵)과 명병(明兵)의 내부 분란으로 성내는 무방비 상태에 빠져 화재가 발생하였고, 그 피해가 늘어나며 도망자가 속출하여 전주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왜군들은 성내에서 수일간 머물다가 일대는 전주를 출발하여 익산·용안·부여·임천·한산·서천을 경유하고, 다시 용안으로 나서서 함열·익산·금구·태인을 거쳐 정읍에 숙영하였다가, 9월 하순부터는 사천·순천·죽도 방면으로 향하였다. 다른 일대는 전주를 출발하여 공주·청주·천일·직산 방면으로 북상하였다가, 상주로 우회하여 10월 중순 양산·울산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당시 전라도 지역을 거쳐 퇴각하는 왜군을 추적하던 전라도 조방장 원신과 김언공은 왜군이 금구 방면으로 퇴각한다는 사실을 알고 금구에서 적을 맞아 싸우기로 하였다. 먼저 금구의 험한 곳에 복병을 배치해 놓고 숨을 죽이면서 패주하는 적을 기다리게 하였다. 복병의 위치는 일면은 험산이요, 일면은 저습지요, 앞으로 나가자니 길의 곡절이 심하고 뒤로 물러서자니 좁은 곳이었다.
매복 사실을 모르는 적장 야나가와 노리노부[柳川調信], 시마즈 다다도요[島津忠豊] 등은 군사를 이끌고 복병이 위치한 곳에 다다랐다. 이에 원신과 김언공은 군사가 많은 것처럼 보이기 위해 산봉우리마다 기치를 세우고 봉화를 올렸다. 북을 치고 나발을 불어 소란스럽게 하면서 매복해 두었던 병사들로 하여금 급히 공격하고 사라지는 게릴라식 작전을 전개하여 적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러한 작전에 크게 당황한 왜군은 혼비백산하여 우왕좌왕하다가 자기들끼리 뒤엉키는 등 전열이 흩어졌고, 이 틈을 타 조선의 군사들은 일제히 공격해 많은 적군을 사살하였다. 왜군은 크게 놀라 무기를 버리고 정유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이 금구대첩(金溝大捷)에서 아군은 전과를 올려 적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금구대첩이 끝나고 이틀 뒤에 벌어진 명량해전에서 우리 수군은 크게 이겨 적 수군의 서해 진출을 막게 되었다. 이 전승으로 왜통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왜통의 위치는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과 용지면의 경계에 있는 구릉지대이다. 왜통은 근래에 들어 부르기 좋게 애통으로 변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