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4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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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代 |
영어의미역 | Ancient Time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백덕규 |
[정의]
전라북도 김제 지역의 삼한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역사.
[관련 기록]
전라북도 김제 지역에 관해 비교적 확실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벽골제 축조에 관한 기사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330년(흘해왕 21) 년의 일이다. 그러나 이 시기 김제 지역은 백제의 영토였으므로, 벽골제 축조는 330년 백제 비류왕 27년에 축조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편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김제의 백제 때 이름이 ‘벽지산(僻支山)’ 또는 ‘벽성’이었다고 하며, 벽성은 한때 백제 부흥군의 근거지였다고 한다. 즉, 사비성이 당과 신라의 침략군에게 함락된 뒤 주류성에 웅거하여 항전하던 풍장왕(豊障王)의 백제 정부가 663년 2월에 주류성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나와 있는데, 이를 통해 비록 60여 일의 짧은 기간이지만 김제가 백제의 왕성으로서 마지막 수도의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백제의 망국사에서 탄현·황산·임존성·주류성 등과 함께 유명한 지명인 기벌포[白江]가 등장하는데, 이는 김제와 관련 있을 가능성이 있다. 기벌포는 660년(의자왕 20) 당과 신라가 백제를 침공했을 당시에 흥수(興首)가 탄현과 함께 특별히 방비하도록 당부했던 곳이며, 당군이 백제군을 패퇴시키고 처음으로 상륙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신라 663년(문무왕 3) 주류성의 함락 직전에는 나당 연합군과 백제·왜 연합군의 해전이 있었고, 676년(문무왕 16)에는 당군과 신라군의 최후 결전이 있었던 해역이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금강구라는 설과 동진강구라는 설이 대립되고 있으며, 주류성의 위치에 관해서도 전자의 경우는 충청남도 한산을 비정하고 있지만 후자는 전라북도 변산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는 금강구가 통설이 되고 있지만, 관련 자료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기벌포는 동진강구, 즉 김제시의 연해인 계화만(界火灣)의 옛 지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663년 주류성의 함락 직후부터는 사실상 당과 신라에 양분되었는데, 백제 영토의 동반부는 신라에 점령되었고 서반부 평야지대는 당에 직속되었다.
신라 통일기 김제를 살펴보면, 757년 전국적으로 지명을 중국식 한자로 변경하였을 때 벽골이 김제로 바뀌었고, 만경·금구 등의 이름도 이때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시대에 특기할 것은 851년(문성왕 13) 해상 영웅 장보고의 근거지인 청해진(淸海鎭)이 폐지되면서 그 주민들을 벽골군으로 이주시켰다는 사실이다. 백제 부흥군이 이곳으로 왔던 사실이나, 청해진 주민을 이곳으로 옮긴 사실은 모두가 이곳이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넓은 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관련 유물 및 유적]
김제 지역의 대표적인 고대 자료로는 1980년 성덕면 대복리의 옛 절터에서 출토된 4점의 금동판불을 꼽을 수 있다. 이 판불들은 원래 봉안 상태를 알 수 없으나 안압지 출토 판불이나 일본의 압출(押出)금동불들과 유사한 종류로서 거의 같은 시기에 제작된 일련의 작품으로, 7세기 백제 말기의 상으로 추정된다. 반가보살상을 주존으로 하는 삼존의 조형은 백제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예배된 반가사유상의 전통을 보여주며 특히 여래 삼존이 모두 좌상의 양식을 보이는 것은 현존하는 삼국시대 작품으로 유일한 예가 되고 있다.
금산면의 귀신사와 금산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진 비교적 규모가 큰 사찰로 당시 김제지역의 불교문화를 추정할 수 있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599년) 법왕의 자복사찰로 창건된 1,400여년의 유서깊은 고찰로서 신라의 유식학승 의적스님이 주석하여 미륵신앙을 근본으로 하는 유식도량으로 사격을 갖추었고, 762년 진표율사가 중창하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미륵도량의 거찰로 면모를 갖추었다. 이에 금산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했던 미륵신앙을 대표하는 사찰로 미륵불을 모셨던 장륙전이 실제로 남아있는 유일한 사찰이며, 935년에는 후백제 견훤왕이 유폐를 당하였던 사찰로 유명하다. 한편 귀신사는 통일신라 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한때 화엄 10찰 가운데 하나로서 ‘금산사’가 이 절의 말사였을 정도로 사세가 컸었다. 현재의 귀신사 주변이 모두 사찰이었으며 주변에는 7-8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진봉면 심포리 해안가에 잡고 있는 사찰로서 망해사가 있다. 사찰의 창건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지만 671년( 신라 문무왕 11)에 승려 부설이 세웠다는 설과 통일신라시대인 754년(경덕왕 23)에 통장법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는데 어느 설이 정확한지는 고증하기 어려우나, 1000년이 넘은 고찰임과 동시에 드넓은 서해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사찰로서 유구한역사와 멋진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금구면 월전리에는 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축성한 테뫼식 산성으로 금구산성이 있는데 산의 서북, 남쪽은 자연 경사면을 이용하였으며, 이러한 자연 성벽을 포함하면 전체 길이가 900여 미터에 이르는 산성이 있다. 산성 주변에 산재한 토기편은 통일신라시대를 전후하여 축성된 것으로 보이며 더 자세한 검토가 요구되는 산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