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388 |
---|---|
한자 | 東津橋 |
영어음역 | Dongjingyo |
영어의미역 | Dongjin Bridge |
이칭/별칭 | 동진대교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도로와 교량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 서포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진성 |
성격 | 교량 |
---|---|
구간 | 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 서포리~부안군 동진면 동전리 |
길이 | 445m |
차선 | 왕복 4차선 |
폭 | 10m |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 서포리 동진강휴게소와 부안군 동진면 동전리 장등마을을 잇는 다리.
[개설]
동진대교가 놓인 동진강 하구에 있던 나루터는 옛날부터 부안과 김제를 잇는 연결 지점이었다. 부안 사람들이 전주나 서울 등으로 나들이할 때 동진나루를 건너 죽산(竹山)~내재역(內才驛)을 거쳐 김제, 금구 또는 이서를 지나 전주에 갔다. 마찬가지로 외지의 사람들이 부안을 찾을 때도 대부분 동진나룻배를 타야 들어올 수 있었다.
[제원]
동진교는 국도 23호선이 동진강을 가로지르는 위치에 놓인 다리로, 길이 445m, 폭 10m, 높이 16m의 4차로이다.
[건립경위]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이미 동진나루에 다리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조선 중종(中宗) 때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제34권, 부안현의 교량(橋梁)조에 동진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동진교(東津橋), 동진의 위쪽에 있다. 신우(辛禑) 초년에 왜선 50여 척이 웅연[지금의 곰소]에 침입하여 적현(狄峴)[지금의 호벌치]을 넘어 부령현을 노략질하고 동진교를 헐어서 우리 군사들로 하여금 더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상원수 나세(羅世)가 변안렬과 더불어 밤에 다리를 구축하고 군사를 나누어 적을 공격하여 마침내 크게 승리하였다(東津橋 吊津上 辛禑初 倭船五十餘隻 來海熊淵 踰狄峴 寇扶寧縣 毁東津橋 使我兵不得進 上元帥羅世 與邊安烈等 夜築橋 分兵擊滅 遂大波之).”
여기에서 신우초라 한 것은 고려의 제32대 임금 우왕(禑王) 5년을 말하며 1379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서 왜구들이 지금의 진서면 곰소로 침입하여 유정재를 넘어 부령읍[지금의 행안면 역리였던 것으로 추정]까지 점령하고 고려의 토벌군이 쉽게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동진교를 헐어버린 것으로 보아 고려 때에 이미 동진나루에 다리가 놓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1978년 동진교가 건설되면서 옛 나루터가 없어졌다. 국도 23호선이 지나가는 동진교는 당시에 2차선이라서 여름철에 부안을 찾는 관광객들이 붐비는 경우에 교통이 매우 혼잡하였다. 이에 따라 최근에 국도 23호선이 4차선으로 새롭게 건설되면서 김제에서 부안까지 가는 시간이 단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