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3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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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龍骨 |
영어음역 | Yonggol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진성 |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에 있는 자연 마을.
[명칭유래]
용추의 ‘용’자와 벽골제(碧骨堤)의 ‘골’자를 따서 용골(龍骨)이라 하였다. 벽골제 둑을 따라 길게 늘어선 마을의 모습이 마치 용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형성 및 변천]
백제시대에 조성한 벽골제 둑이 오랫동안 방치되어 파괴되면서 둑 밑에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둑이 다시 축조되고 무너지길 반복하면서 시대에 따라 많은 마을들이 만들어졌다가 사라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1420년(세종 2)에 홍수로 둑이 무너져 둑으로서의 기능이 약화되자 점차 민가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고, 그 뒤 남아 있던 제3수문 중심거(中心渠)마저도 파괴하고 민가들이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포교(浦橋)마을[일명 갯다리] 신용교에서 초승마을 신흥교에 이르는 둑 아래쪽을 따라 가옥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현황]
문화재로는 사적 제111호로 지정된 김제벽골제비 및 제방이 있다. 벽골제는 포교마을에서 용골마을을 지나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 명금산(鳴琴山)[54.1m] 기슭 초승마을까지 걸쳐 있던 긴 둑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길이가 긴 수리 시설로 알려져 있다.
벽골제는 둑 길이 약 3.3㎞, 둑 아래 폭 일흔 자, 위 폭 서른 자, 높이 일곱 자로, 여기에 물을 가두고 수여거·장생거·중심거·경장거·유통거 등 다섯 개의 수문을 통하여 9,840결, 즉 100㎢의 농지에 물을 공급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장생거와 경장거의 기둥만이 남아 있다.
벽골제비(碧骨堤碑)는 벽골제를 다시 쌓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1415년에 세웠다. 벽골제비가 닳아 없어지자 1684년(숙종 10)에 다시 만들어 김제시 부량면 용성리 신털미산[일명 초혜산(草鞋山)]에 세웠고, 1975년 장생거 옆으로 옮겼다가 1980년 전화 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높이 195㎝, 폭 105㎝, 두께 13㎝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