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2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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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廣活面 |
영어음역 | Gwanghwal-myeon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광활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진성 |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에 속하는 법정면.
[명칭유래]
전라관찰사를 지낸 이서구(李書九)가 광활간척지를 가리켜 ‘구구지간 광활만인지지(九區之間廣闊萬人之地)’라고 했듯이,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고 넓다는 뜻에서 광활(廣活)이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기 김제군 진봉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49년 8월 15일 진봉면의 광활한 간척지를 갈라서 광활면을 신설하고 옥포리(玉浦里)·은파리(銀波里)·창제리(蒼提里) 등 3개 리 9개 마을을 편입하였다. 1952년 9월 5일, 해일로 말미암아 광활방조제 일부가 유실되어 1.87㎢의 논이 유실되고, 3,352명의 수재민이 발생하는 불행을 겪었으나 정부의 수재민 구호와 연차적인 국고 보조금 및 지방비 지원으로 광활방조제를 복구하여 1964년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 광활면이 되었다.
[자연환경]
거북 형상을 한 지역으로 남서쪽은 동진강(東津江)이 합류하는 서해와 인접한 평야 지대이다. 광활면의 유일한 산인 대민가산이 솟아 있다.
[현황]
2014년 12월 31일 기준 면적은 32.14㎢이며, 2016년 6월 30일 현재 총 770세대에 1,521명[남자 766명, 여자 75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으로 성덕면, 남쪽으로 바다 건너 부안군 동진면, 서쪽으로 서해, 북쪽으로 진봉면과 이웃하고 있다. 옥포리·은파리·창제리 등 3개 법정리와 20개 행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주요 기관으로 김제시 광활면 옥포리에 있는 광활면사무소를 비롯하여 우체국, 파출소, 금융 기관, 보건지소, 보건진료소, 초등학교 등이 있다.
광활면사무소가 있는 옥포리 화양마을에는 약 330.58㎡의 큰 창고 5동 있어 양곡을 보관하였는데, 3동은 헐리어 광활초등학교가 들어섰고, 다른 1동은 헐리어 교회가 들어섰으며, 나머지 1동은 농업협동조합 비료 보관 창고로 이용하고 있다.
옥포리 시농마을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간척지의 소금기에 강한 품종을 만들고자 대지 19,834.71㎡에 3,966.94㎡나 되는 농업시험장을 만든 곳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마을 이름도 농업시험장을 줄인 시농이 되었다. 당시 농업시험장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광활면 단위농업협동조합 사무실과 동진농지개량조합 광활출장소가 있다.
광활간척지는 1923년 10월 일본인 아베 후사치로[阿部房次郞]이 자기 자본 100만 엔과 일본 정부 보조금 100만 엔 등 총 200만 엔을 들여 동진농업주식회사를 창설하고 광활방조제를 쌓기 시작하여 만 3년 만에 준공하였다. 그러나 바닷물이 드나들던 간석지를 농지로 만드는 데는 약 9년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 일본인들이 1,928정의 간척지를 관리하기 위해 1답구에서 9답구까지 나누고 소작인들의 노동력을 최대한 착취하고자 격자 모양의 경지마다 일렬로 6가구씩 배치하였는데 이것이 곧 육마을 또는 여섯가구뜸과 같은 마을 이름이 되었다. 이에 비해 일본인들이 사는 면소재지에는 술집과 정미소를 비롯한 각종 편의 시설을 갖추었다.
또한 일본인들의 가옥은 터를 돋우고 유리창을 이용하여 바닷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지었으나 한국인들은 물이 올라오는 평지에 초가집을 짓고 겨울철 차가운 바람을 막기 위해 볏짚을 엮어 처마 밑에 둘렀기 때문에 한낮에도 집안이 컴컴하였다.
광활방조제는 옥포리 시농마을 남쪽에서 창제리 신광마을 서쪽으로 뻗어 있는 제방으로 동진농업주식회사에서 1924년 완공하였다. 광활방조제가 완공됨에 따라 은파리·옥포리·창제리 일대에 16.51㎢의 농지가 만들어졌다. 광활저수지는 둘레 약 4㎞, 넓이 1.2㎢의 규모였는데, 1980년대 중반 동진농지개량조합에서 메워 논으로 변모하여 지금은 협업농장이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