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0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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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儒敎 |
영어의미역 | Confucianism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
집필자 | 이용엽 |
[정의]
전라북도 김제 지역에 보급된 종교로서 유학의 연원과 전개 현황.
[개설]
호남은 지역적으로 영남유학과 대별되는 기호유학에 포함되어 있다. 호남 향촌사회의 유학자들은 도학사상을 기반으로 학술활동 및 치민활동을 하면서도 의리와 실천을 그 근본정신으로 하는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김제 지역 유교의 전래는 김제향교와 금구향교, 만경향교를 중심으로 용암서원을 비롯한 30여 개의 서원·재·강당에서 유학사상인 충(忠)·효(孝)·열(烈)을 중심으로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면서 시작되었다. 나아가 조선시대에는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것을 으뜸으로 여기는 유교가 사회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러므로 충신이나 효자, 열녀 등은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예우되고 칭송을 받았기에 그들의 행실이 돋보이는 경우에는 국가에서 그들에게 벼슬을 내리거나 죽은 후에 가자(加資)를 주어 정려문을 세우게 하였다. 김제 지방에 왕명으로 세워져 지금 남아 있는 정문이 효자 구산처사 나응삼 정려를 비롯하여 80여 개가 있다.
[유학자]
김제 지역에서는 금구향교[1390년]·김제향교[1404년]·만경향교[1407년]가 건립되면서 문묘 배향이 이루어지고, 계통적으로 유맥이 퍼져서 유학이 발전해왔다. 특히 서원을 세워 이 지역에서 태어나 유학에 공헌한 바가 큰 인물을 숭모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김제 지역과 관련한 유학자로는 고려 고종 때 주자와 정주학의 으뜸이라 불려 용암서원에 배향된 조간(趙簡)이 있다. 박의중(朴宜仲)[1337~1403]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의(義)를 내세워 김제시 흥사동에 내려와 후손을 가르쳤던 유학자이다.
여러 차례 변고를 당하면서도 신하의 도를 굳게 지킴으로써 유림들의 추앙을 받아 전주의 서산사와 김제의 용암서원에 배향된 이계맹(李繼孟)[1458~1523], 『고려사(高麗史)』 편찬 시 국상·조준봉·정인지를 도와 뛰어난 문장력으로 크게 공헌하여 완주의 학천서원과 김제의 승방서원에 배향된 정곤(鄭坤), 잠깐 벼슬길에 올랐으나 거의 야인으로 지내면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여 수많은 선비들의 존경을 받은 유학의 대가 유집(柳緝)[1585~1652]도 김제 지역 유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유도(柳棹)[1604~1663]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과 군량을 모아 오랑캐와 맞서 싸우다가 강화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였는데, 백석서원에 모셔져 제향되고 있다. 그밖에 김제 지역 유학자로 나중우(羅仲佑)·박초(朴礎)[1367~1454]·나득강(羅得康) 등이 있다.
[관련 유적]
전라북도 김제 지역에는 김제향교·금구향교·만경향교를 비롯해 용암서원·삼현서원·벽성서원과 구성사(九成祠)·낙양사(洛陽祠)·육송사(六松祠) 등 20여 개의 서원과 사당이 있다. 김제향교는 1404년(태종 4) 처음 세워졌으며, 정유재란 때 건물이 모두 불탄 후 1635년(인조 13)에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다.
대성전에 공자를 모시고 있고, 중국의 여러 성현과 공자의 제자들도 모셨으며, 좌우 동무·서무에는 조선 유학자를 배향하고 있다. 용암서원은 1488년(성종 17) 세워졌으나 병화로 불타 없어지고 1575년(선조 8) 중건된 것을 1612년(광해군 4)에 성산 아래로 옮겨 세웠다. 이곳에서는 문양공 조간을 중심으로 이계명·나응삼·윤추·나건계·이구천·조윤침 등을 모시고 있다. 그리고 김제시 금산면 용산리 기룡마을의 구성사에는 윤순거·윤증 두 분을 배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