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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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學農民革命-最後激戰地金溝-金德明將軍 |
영어의미역 | General Gim Deokmyeong and Geumgu, Ferocious Battlefield of Donghak Peasant Revoluti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승대 |
[개설]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는 옛 금구현 원평(院坪)으로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 당시 전봉준(全琫準)[1855~1895]과 김덕명(金德明)[1845~1895]이 이끈 동학농민운동의 진원지이자, 원평집회와 최후의 결전이라 할 수 있는 원평·구미란(龜尾卵) 전투가 벌어진 동학농민운동사의 중요 무대이다. 금구 출신의 김덕명 장군은 당시 동학 남접으로 전봉준과 함께 가장 치열하게 당대를 움직였던 중심인물로 평가된다.
[동학농민운동의 씨앗이 싹튼 김제 원평 장터]
5일장이 서는 김제 원평 장터는 현대적인 교통수단이 없던 조선시대에 보행 교통의 중심지로서 동학농민운동의 진원지이기도 하였다. 전라도 각 고을의 동학 접주들이 모임을 가졌고, 전라도 대도회소(大都會所)가 있어서 1893년 3월 금구원평취회가 열렸으며, 동학농민군이 전주(全州) 입성 하루 전에 선전관 이주호(李柱鎬) 외 4명을 참수하여 혁명의 결연한 의지를 다진 곳이기도 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오늘날의 김제 지역에는 김덕명을 비롯해 영호대접주인 김인배(金仁培)와 김사엽(金士曄), 김봉득(金鳳得), 김봉년(金奉年) 등의 지도자가 있었고, 금구에서 송태섭·유공만·김인배, 김제에서 조익재·황경삼, 만경에서 진우범이 농민군을 이끌었다. 김덕명은 처음 백산에서 농민군 대회를 열었을 때 총참모로 추대되었는데, 김덕명포에서는 2,000여 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이해 9월 2차 항일 전선이 형성될 때 금구에서 김봉득이 5,000여 명, 김제에서 김봉년이 4,000여 명, 원평에서 송태섭이 7,000여 명을 거느리고 공주 우금치전투에 참여하였다.
[김덕명과 전봉준의 만남]
김제 향토사학자인 고 최순식 선생은 전봉준이 한때 원평에서 1㎞ 떨어진 정읍시 감곡면 황새마을에서 살았다고 밝혔다. 한편 전봉준이 봉남면 종덕리 종정마을 강당에서 한문을 익혔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어, 한때 김제에 살았다는 이야기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전봉준은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나 아버지 전창혁(全彰赫)을 따라 유년 시절에 정읍시 감곡면 계룡리 186번지 황새마을로 이주한 뒤 17~18세까지 살면서 봉남면 종정마을 강당에서 공부를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원평 장터에서 황새마을은 1㎞ 남짓 떨어져 있고, 전봉준 부자(父子)가 언양김씨 집성촌인 거야(巨野)와 신암(新岩)을 배회하며 식객(食客) 노릇을 하였으며, 외가가 언양김씨여서 신암을 자주 찾았다는 이야기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금구대접주(金溝大接主) 김덕명과 전봉준의 끈끈한 인간관계는 외척(外戚)이라는 혈연으로 연결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김덕명은 원평에서 1㎞ 떨어진 용계마을에 살았고, 전봉준의 어머니 언양김씨는 김덕명과 일가로 추정할 수 있다. 또 전봉준의 가족이 한때 김덕명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였다는 설도 있어, 예전에는 본관만 같아도 끈끈한 혈연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니 전봉준 집안이 김덕명의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어떠한 인연으로 두 사람이 만났는지 확실한 사실은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두 사람 모두 의협심이 강하고 지도력이 뛰어났으며, 동학농민운동의 중심에서 주도적인 구실을 하였다는 점이다. 1893년 계사년 금구 원평집회를 주도한 인물도 김덕명과 전봉준으로 확인된다.
금구대접주 김덕명포가 원평 장터를 중심으로 전라도 지역의 동학을 이끌면서 원평 장터는 자연히 전라도의 접주들이 모이는 도회소가 되었다. 현재 원평리 주민 김영태가 거주하고 있는 집[금산면 원평리 184-3]최초 금산면 사무소]이 바로 전라도의 접주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던 도회소였다고 전해 온다.
백정 출신으로 ‘동래개’라는 별명을 가진 동록개(董錄介)가 동학의 개벽 평등사상에 감복하여 자기 집을 동학 교주 최해월(崔海月)에게 도회소로 바쳤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을 바꾼 금구 원평집회]
1892년부터 공주와 삼례에서 교조 신원 운동(敎祖伸寃運動)을 계속하던 동학 교단은 이듬해에 교조(敎祖) 최수운(崔水雲)이 1864년(고종 1) 대구감영에서 참수당한 날인 3월 10일을 기해 충청도 보은과 경상도 밀양, 전라도 원평에서 일제히 교조 신원 운동을 전개하였다.
북쪽의 충청도 보은집회와 때를 같이하여 남쪽의 전라도 원평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김덕명을 비롯하여 전봉준·김개남(金開男)·손화중(孫化中)·최경선(崔景善) 등이 거느리고 있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집회를 주도하였다. 또 남접에 속하는 서장옥(徐璋玉)·황하일(黃河一)의 세력들도 섞여 있었다. 그러기에 원평집회는 곧 터질 듯한 강렬한 분위기였다.
불갑사·백양사·선운사 등 전라도 유명 사찰의 승려들도 참여하였고, 이들 속에는 각지에서 농민 봉기를 주도한 직업적 봉기꾼들이 끼어 있었다. 이들은 조용히 눈치를 살피는 보은집회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곧바로 제물포로 달려가자고 외치기도 하였다. 전봉준은 원평집회를 이끌면서 관의 주목을 피하고자 이름을 자(字)인 명숙(明叔)으로 바꾸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명성은 이때부터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무장에서 봉기한 전봉준의 농민군은 황토현에 이어 장성에서 승리를 거두고, 대오를 정비한 뒤 나팔 소리를 크게 울리면서 갈재를 넘어 내달아 1893년 3월 13일 원평에 이르렀다. 원평에 설치한 대장소에는 활기가 넘쳐흘렀다.
전봉준이 원평에 주둔하고 있을 때 홍계훈(洪啓薰)의 경군(京軍)이 보낸 이효응(李效應)과 배은환(裵垠煥)이 왕의 편지를 들고 대장소로 전봉준을 찾아왔고, 이주호는 하인 2명을 데리고 내탕금(內帑金) 1만 냥을 들고 찾아왔다. 전봉준은 내탕금을 빼앗은 뒤 원평 장터에 군중을 모아 놓고 이들의 목을 베어 시체를 마을 뒤에 버리고, 그들이 지니고 있던 증명서와 문서는 시체 위에 던졌다. 왕이 보낸 편지는 읽어 보지도 않았다.
좀처럼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 전봉준이 이런 행동을 한 것은 어떤 회유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강렬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제 전봉준과 농민군은 감영군과 중앙군을 격파하고 왕이 보낸 사자를 죽이고 내탕금마저 빼앗았으니 영락없는 역적의 무리가 되었다.
원평집회는 고종에게 보고되었다. 1893년 3월 21일 신임 전라감사 김문현이 고종에게 하직 인사를 할 때 고종은 “호남에서도 금구에 비도들이 가장 많이 산다고 하는데, 전주감영에서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먼저 그 소굴을 없애서 변고를 다스리는 방도로 삼으라.” 하고 지시를 하였다. 신임 감사는 “거리가 30리쯤 됩니다만, 금구 원평은 과연 도당들의 집결지라고 합니다. 삼가 성상의 하교대로 엄히 다스리겠습니다.” 하고 답하였다.
원평집회는 대단한 사건이었다. 전라도에서 보은집회에 참가하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서 의지를 다졌던 집회였으나 오히려 보은집회의 방향을 돌리는 구실을 하였다. 단순한 포교의 공인을 넘어서 사회 운동·정치 운동으로 집회의 목적을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원평집회와 같은 날에 보은 장내리(帳內里)에서 집회가 열렸을 때 어윤중(魚允中)이 양호도어사(兩湖都御史)로 보은에 내려갔는데, 관직의 이름에 양호를 붙인 것은 보은집회와 함께 원평집회에 모인 사람들을 해산시키는 일이 주 임무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나중에 변절해서 동학농민군을 체포하는 데 협조한 서병학은 호남취당(湖南聚黨)은 위험하다고 어윤중에게 말할 정도였다.
고 최순식 선생은 원평집회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강변에 사람들이 모여서 한꺼번에 주문을 외웠는데 그 소리가 요란했답니다.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암송이 끝나면 가지고 있던 막대기를 딱 쳤지요. 그 소리가 구미란마을까지 울렸답니다.”
원평은 1894년 동학농민군이 봉기했을 때도 중요한 거점이었다. 매천 황현(黃玹)은 『오하기문(梧下記聞)』에서 3월 20일 이후 고부에서 시작하여 태인, 흥덕, 고창, 금구, 부안, 김제, 무장으로 확대된 사실을 기록하였다. 초기 동학농민군이 결성되어 집중 활동한 곳에 금구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여러 날 동안 원평집회에 참여한 농민들은 어떻게 숙식을 해결했을까? 알려진 바는 없으나 보은 장내리의 사례로 미루어 보면, 밤에는 여러 마을에 흩어져 잠을 자고, 식사는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해결했을 것이다. 또 농막과 같이 임시 거처할 곳도 만들었을 것이다.
원평집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결속력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봉준을 전적으로 신임하고 뒷받침해 준 김덕명 대접주가 이끌던 포가 핵심을 이루었고, 뒤에 고부에서 농민 항쟁이 일어날 때나 무장 봉기를 시작한 다음에도 전봉준 장군을 따라서 활약했던 정예 4,000명의 동학농민군의 주축이었을 것이다.
[원평집회의 주역 김덕명 장군]
김덕명의 본관은 언양, 초명은 준상(峻相), 호는 용계(龍溪)이다. 동학 교문에서 한때 필상이라는 이름을 썼다. 아버지는 김한기(金漢驥), 어머니는 파평윤씨이다. 신분은 향반이며 중농 정도의 경제력이 있었으며, 일을 계획하는 데 능했으나 실천 단계에서는 뒤로 물러나는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1891년 동학 접주가 된 김덕명은 금구 지방으로 순회 온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여러 가지 가르침을 받고, 이듬해에 전라북도 삼례에서 벌어진 교조 신원 운동에 많은 교도들을 동원하여 참가하였다.
1893년 보은 장내리 집회에 참가하여 금구포(金溝包)라는 포명과 대접주의 임첩(任帖)을 받았다. 1894년에 전봉준·손화중·김개남과 더불어 호남창의소를 설치하고 동학농민운동의 횃불을 올렸는데, 오시영(吳時泳)과 더불어 총참모가 되어 운동 초기부터 전봉준의 주력을 이루었다. 금구 원평에서 막강한 세력을 이룬 김덕명 휘하에는 최경선·김봉년·김사엽·김봉득·유한필과 같은 패기에 넘치는 젊은이가 있었다.
1894년 4월 백산봉기 때에는 총참모를 맡았는데, 실제 전투에 참가하였다기보다는 농민군의 전술을 자문하는 역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김덕명이 전봉준보다 10세 연상인 50세로 당시로서는 고령의 나이였고, 무엇보다 김덕명이 출전했다는 기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5월 말경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전주성을 공격할 때는 인적·물적 지원을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김덕명의 이러한 활동은 지리적 용이성과 풍부한 물산을 가진 원평 지역을 배경으로 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원평은 전주에서 서남쪽으로 15㎞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지리적 요충지이자 인근에서 생산되는 물산이 한데 모여 거래되는 집산지이자 정보가 거래되는 곳이었다. 또한 갑오년 1차 봉기의 중심지였고, 가을 우금치전투 패전 이후 관군과 일본군의 추격을 받던 농민군 주력이 마지막으로 전투를 벌인 원평·구미란 전투의 현장이었다.
현재 원평에는 김덕명 장군의 생가 터, 원평·구미란 전투지, 남접의 도회소인 집강소, 전봉준의 아버지인 전창혁의 유허지[계룡리 황새마을 178번지] 등의 유적지가 있다. 그러나 생가 터의 위치가 불분명하며, 김덕명이 금산면 삼봉리 거야마을에 살았다는 설도 있으나 거야마을의 집 위치도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
김덕명은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집안의 재실이 있는 안정사 절골에 숨어 있다가 지인의 밀고로 서울로 압송되어 1895년 4월 23일 전봉준·손화중·최경선·성두환(成斗煥)과 함께 처형되었다. 농민군 지도자의 무덤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던 김덕명의 무덤은 최근 후손들이 파묘하여 유골을 화장한 후 납골당에 안치하였다.
[동학농민군 최후의 결전, 원평·구미란 전투]
원평·구미란 전투는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에 대항하여 치열하게 전개한 최후의 전투 중 하나이다. 원평은 동학농민군이 1894년 11월 우금치전투에서 크게 패한 뒤 논산과 전주를 지나 찾아간 근거지였다.
동학농민군이 고부로 가지 않고 구미란마을로 간 것은 손병희(孫秉熙) 통령이 이끌던 북접 농민군이 우금치전투 이후에 장수·무주를 거쳐 충청도로 들어가서 황간·영동·청산을 지나 보은 장내리로 돌아간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즉 북접 농민군이 발생한 곳이 장내리였다면, 호남 농민군의 고향은 원평이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1894년 5월 31일 전봉준의 동학농민혁명군은 전주를 무혈점령한 후 전라감사 김학진(金學鎭)과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고 집강소(執綱所) 정치에 참여하다가 외세를 불러들이는 정부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9월 다시 봉기하여 삼례에 집결하여 충청감영인 공주를 향해 진격하였다.
11월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일본군의 신무기 화력 앞에 처참한 패배를 맛본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은 전주를 내준 채 설욕을 다짐하며 원평에 재집결하여 마지막 결전을 위해 전열을 가다듬었다. 원평과 구미란 사이에 있는 구미산(龜尾山)에 진을 친 1만여 동학농민군은 패잔병으로 비록 무기는 보잘것없었으나 결사 항쟁으로 최후까지 싸우겠다는 결의는 충천하였다고 한다.
11월 25일 아침 뒤따라온 일본군과 관군 300여 명은 구미란마을 앞 원평천 변 들판에 진을 치고 뒷산을 올려다보았다. 농민군 수천 명은 한 명령 계통을 따르는 일성팔렬진(一聲叭列陣)을 삼면에 펼친 ‘품(品)’자 진을 만들고 한쪽을 터놓고 있었다. ‘품’자 배치는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전면에 한 부대, 뒤에 두 부대를 배치하는 진형으로, 적이 틈만 보이면 세 대열로 분산해 들판으로 내려갈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관변 측 기록에는 “포 소리가 우레와 같고 나는 탄환이 비처럼 쏟아졌다. 적은 산위에 있고 우리 군사는 들판에 있었다. 우리 군사는 사면을 둘러싸고 있었다. 서로 내지르는 함성이 땅을 울렸고 대포의 연기가 안개를 자욱하게 이루어 멀고 가까운 곳을 전혀 구별할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또 다른 기록을 보자.
“29일 맑음. 오후에 부내의 강순화를 가서 보았다. 순화가 술을 대접하였다. 태인이 패전하였다는 도인의 말을 들으니 27일 새벽에 경군과 왜군이 전주의 부중으로부터 소사령을 넘지 않고 돌아서 금구의 경계에 이르러서 아침밥을 먹을 때 원평의 도진과 맞붙었는데 뜻하지 않게 도륙하였다. 도인 중에 부상자는 수백 명, 생존자는 수만 명이었고, 한꺼번에 흩어져 도망하여 마치 냇물이 터지는 것 같았다. 태인읍 뒤 선양현으로 퇴진하였다가 그날 경군이 추격하여 접전하였으나 도진이 또 패하여 다친 자가 무수하였고, 도주하여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전명숙은 겨우 몸만 면하였다, 경군이 400~500명에 불과하였는데 지나는 읍에 모두 폐를 끼치지 않고 그릇을 싣고 직접 불을 때 밥을 하였다. 전주성 밖 주접주의 집이 탔으며, 원평은 모두 불에 탔고, 태인 동쪽 고을은 도륙되었다. 나머지는 한 사람도 살해되지 않았다. 싸움에 패한 도인 수백 명 중에 본 읍을 지나간 자는 모두 경기, 호중[충청도], 전주 사람이었다. 총탄에 맞아 부상을 당한 자가 그 수를 알 수 없었으며, 광주 덕산 손화중의 진지로 갔다고 한다.”
전투 이후 원평 뒷산에는 농민군의 시체를 묻은 초라한 공동묘지가 생겨났다. 뒷날 이곳 격전장에서 놀던 아이들은 널려 있는 탄환을 주워 놀이 도구로 썼다고 한다. 더욱이 이곳 사람들은 서로 싸움질을 하다가 감정이 욱해지면 “너에게 죽으려면 갑오년 유탄에 맞아 죽었어.”라는 말을 곧잘 뱉었다고 한다. 당시 유탄에 죽은 주민들도 많았음을 짐작케 한다.
원평·구미란 전투가 얼마나 치열하였는지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기록에도 잘 나타난다. “14시경 파송대관 최영학 솔교도병 1대 일본병 1대 금구에서 하룻밤을 자고 1894년 11월 25일 새벽 5시경 행군하여 원평에 도착하니 동학군 수만 명이 나팔 소리 하나로 삼면으로 품자형 진을 치더라. 적과의 거리는 천 보이고 서로가 포를 쏘는데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싸웠다. 포성은 번개 치는 소리 같았고 탄환은 비 오듯 하였으며 적은 산 위에 있고 아병은 들에 있었다. 사방에서 울리는 함성은 천지가 진동하고 불꽃의 연기는 안개와 같이 자욱하여 원근을 구별할 수가 없었다.”
원평으로 들어온 진압군은 일본군 지대와 이에 배속된 경국 교도중대 1대였다. 일본군에게 무기와 탄약을 통제당하며 일본군의 지휘 아래 동학농민군을 진압했던 교도중대장 이진호는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올렸다.
“대관 최영정이 칼을 뽑아 적을 향해 앞장서서 산 위에서 지휘하며 호령하였고, 동서로 부대를 나누어 한번 힘을 써서 먼저 올라가서 찌르거나 목 베어 죽인 적이 37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과 경군의 기습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음에도 37명만 사살하였다고 기록한 것은 대량 학살에 따른 비난을 우려해서 사망자 수를 줄인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군이 우금치전투 이후 학살자의 수를 상세히 기록하지 않고, 오히려 축소한 것이 여러 자료에서 드러난다.
『순무선봉진등록(巡撫先鋒陣謄錄)』에 따르면, 원평에 와 보니 점포와 마을 집 40여 호가 불에 타고, 군량으로 쌓아둔 100석과 민가의 가재도구가 모두 불에 타 보기에 극히 처참하였다. 태인 석현에서도 10집이 불에 탔고, 태인읍 700~800호도 참화를 입었다.
이러한 학살은 당시 전국 각지에서 자행되었다. 아직도 공주, 홍성, 보은, 홍천, 논산, 장흥, 강진, 광양, 해남, 진주, 하동, 상주, 예천, 강릉, 해주 등지에 동학농민군의 원혼이 떠돌고 있다. 원평에서는 구미란 뒷산과 학수재 앞산에 묻힌 이름 없는 희생자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학수재에 무명농민군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