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013 |
---|---|
영어의미역 | The Novel Arirang: The Land Holding Joys and Sorrows of Peasant in Gimj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윤애 |
[개설]
조정래(趙廷來) 대하소설 『아리랑』은 동학농민운동 이후부터 8·15광복 때까지 전라북도 김제의 드넓은 평야를 주요 배경으로 하여 한민족의 수난과 투쟁을 그린 작품이다.
『아리랑』은 조선에서 곡물을 수탈해 일본으로 실어 나르던 항구 도시 군산에서 시작해서 주요 작중 인물들의 궤적을 따라 한반도 전역과 만주, 러시아, 하와이, 동남아시아 등으로 폭넓게 전개된다. 작가는 이 과정에서 우리 민족이 일제에 의해 어떻게 수탈당하고 어떻게 저항하며, 토착 자본이 어떻게 무너지고 친일파가 어떻게 일제와 야합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민족의 아픔을 토로하고 당시 농민들의 애환을 그리면서 일제강점기의 민족사가 수난과 굴욕의 역사가 아닌 저항과 투쟁의 역사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서 일제강점기의 수난의 시대를 살았던 당시 농민들이 부르는 ‘아리랑’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다.
[『아리랑』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김제]
소설에서는 김제·만경평야, 금산사(金山寺), 일본인 대농장, 외리마을, 동진강(東津江) 간척지 등 김제 지역이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다.
1. 김제·만경평야
김제는 전라북도 중앙부의 서쪽에 자리 잡은 곳으로 동쪽은 노령산맥(蘆嶺山脈)의 주능선을 경계로 완주군, 남쪽은 동진강을 경계로 정읍시·부안군, 북쪽은 만경강(萬頃江) 및 그 하구를 경계로 익산시·군산시와 이웃하고, 서쪽은 서해에 닿아 있다. 시 전체가 해발 고도 50m 미만의 구릉지와 동진강·원평천(院坪川)·만경강 주변에 펼쳐진 광대한 충적 평야 지대로 이루어져 호남평야의 중심이 된다.
만경강과 동진강 사이에 펼쳐진 김제·만경평야는 김제시 전체 면적 거의 절반이 되는 광활한 곡창 지대로 우리나라 쌀의 40분의 1이 생산된다. 이곳 사람들은 김제·만경평야를 ‘징게맹게 외배미들’이라 부른다. 외배미들은 너른 들, 곧 평야를 일컫는 말이니 ‘김제 만경 너른 들’이라는 뜻이다.
조정래는 『아리랑』 도입부에서 김제·만경평야의 분위기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초록빛 싱그러움을 뒤덮으며 들판에는 갯내음 짙은 바람이 불고 있었다. 거칠게 휘도는 바람을 앞세우고 탁한 회색빛 구름이 바다 쪽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시커먼 먹구름은 하늘을 금방금방 삼켰다. 그리고 그 두껍고 칙칙한 구름 덩어리들은 서로 얽히고설켜 꿈틀대고 뒤척이며 뭉클뭉클 커져 가고 있었다. …… 초록빛으로 가득한 들녘 끝은 아슴하게 멀었다. 그 가이없이 넓은 들의 끝과 끝은 눈길이 닿지 않아 마치도 하늘이 그대로 내려앉은 듯싶었다.”
2. 금산사
금산사는 599년(백제 법왕 1)에 창건하였고, 766년(혜공왕 2) 진표율사(眞表律師)가 금당에 미륵장륙상을 모시고 도량을 중창한 뒤 법상종을 열어 미륵 신앙의 근본 도량으로 삼았다. 935년(태조 18) 후백제 견훤(甄萱)의 아들 신검(神劒)이 견훤을 유폐한 곳이기도 하다. 1079년(문종 33)에는 혜덕왕사(慧德王師)가 대사구·봉천원·광교원 등을 설치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뇌묵(雷默) 처영대사(處英大師) 등 1,000여 명의 승병들이 훈련한 곳으로, 정유재란 때 80여 동의 전각과 산에 있는 암자가 왜군의 손에 모두 불타는 비운을 겪었다.
1601년(선조 34) 수문대사(守文大師)가 10여 명의 도반들과 함께 35년간 복원 불사를 벌여 대사구 지역을 일부 재건하였고, 조선 말기에는 환성 지안대사가 수많은 승려들이 운집한 가운데 화엄 산림 법회를 성대하게 개최하였다. 용명 등 수많은 고승 대덕들이 주석하던 절이다.
3. 일본인 대농장
일제강점기 전라북도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척식농장, 교본농장[하시모토농장], 웅본농장, 아부농장, 다목농장, 석천농장, 승부농장, 정목농장 등 일본인 대농장 9개가 있었다. 이들 농장들은 약 4.96㎢까지는 총독부 인가를 받았고, 그 이상은 일본 정부의 인가를 받아야 했다. 척식농장은 국책 농장으로 전국에 있었고, 교본농장은 김제시 죽산면 서포리의 개간지를 중심으로 농장을 이루었다.
4. 외리마을
외리마을은 300여 년 전 장씨와 임씨 등이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마을로, 이웃 내촌마을보다 뒤늦게 형성되었다. 외리라는 이름은 내촌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내촌마을은 혼상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1040년대에는 비홍락지(飛鴻落地)의 명당이 있다 하여 홍산촌(鴻山村)이라 불렀다. 그 후 박씨 문중의 한 장수가 임진왜란 때 전사하여 그의 말과 안장과 칼만 돌아왔는데, 그 말이 죽은 뒤에 묻었다는 말미동산, 기러기가 날아가다 쉬어 간다는 홍지뫼[鴻止山], 화초산 줄기 등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내리로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내촌이 되었다.
5. 동진강 간척지
동진강 간척지는 김제에서 부안 쪽으로 15㎞쯤 떨어진 동진강 하류 강둑 위로 펼쳐진 평야 지대이다. 1924년 동진농업주식회사가 9.5㎞의 방조제를 준공하여 간척지를 조성하였고, 1927년과 1929년, 1932년에 걸쳐 여러 개의 방조제를 건설함으로써 만경강 입구의 진봉면을 비롯하여 동진강 입구의 광활면·죽산면·동진면 일대에 거대한 간척지가 조성되었다.
농장에서는 간척지를 조성한 뒤 임의로 토지를 측량하고 토지 구획을 하여 직사각형 농경지와 수로와 농로를 따라 같은 규모의 일자이간형(一字二間型) 가옥을 마을을 가운데 열촌형으로 조성하여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취락 형태인 괴촌과는 다른 이질적인 산촌이 출현하였다.
일조량이 많고 병충해 발생이 적으며, 퇴적 유기물과 무기질이 풍부한 갯벌 간척지에서 생산되는 이 지역의 청결미는 낟알이 크고 투명도가 높으며 밥맛이 차지고 쫄깃쫄깃하다. 근래에는 완벽한 도정 시설을 갖추어 생산되고 있다.
[『아리랑』에 나타난 민초들의 모습]
소설 『아리랑』에는 몇몇의 지도자 역할을 하는 주인공이 등장하지만 대부분의 등장인물은 김제 지역의 소박한 농민들이다.
1. 감골댁 사람들
감골댁은 동학군이었던 남편의 병을 치료하면서 진 빚 때문에 맏아들이 하와이로 팔려 가고, 미모가 빼어난 두 딸은 지주와 일본 앞잡이에게 수모를 당하는 수난을 겪는다. 뼈저린 가난 속에서도 가족을 지키고 독립에 대한 염원을 버리지 않는 한국 어머니의 위대함과 민족정신의 숭고함을 보여 준다.
아들 방영근은 집안이 어려워지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노동 이민을 떠난다.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꿈꾸며 결혼도 늦추고 사탕수수 농장과 파인애플 농장에서 일하다가, 나라가 망하자 국민군단 훈련에 참가한다.
큰딸 방보름은 남편이 의병 활동 혐의로 총살당한 뒤 시아버지를 모시고 아들 삼봉과 같이 산다. 시아버지마저 토지 조사 사업 반대 혐의로 고초를 겪다가 세상을 떠나자 군산으로 내려온다. 아들을 잘 키워 죽은 시아버지와 남편에게 보이겠다는 일념으로 평생을 참고 노력하는 운명에 순응하는 여인이다.
셋째 딸 방수국은 하시모토가 첩으로 삼으려 하는 것을 피해서 가족과 함께 군산으로 이사한다. 경신참변으로 어머니를 잃고 동생과 헤어진 방수국은 보부상 양치성과 동거하지만, 양치성이 밀정인 것을 알게 되자 칼로 찌르고 도주하여 독립군으로 활동한다. 언니 방보름과 달리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의지가 강한 여인이다.
막내 방대근은 독립에 대한 생각이 뚜렷하고 바른 청년이다. 누이 방수국이 백남일에게 겁탈당하자 백남일을 폭행하고 송수익을 따라 만주로 피신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김좌진 독립군 소대장, 항일연군 한국광복군 비밀감찰대장으로 활동하면서 무장 항일 투사가 된다. 소설 『아리랑』의 큰 뿌리로서 끝까지 생존한다.
2. 송수익 일가
송수익은 양반 가문의 아들이지만 하인들에게 존대어를 사용할 정도로 진취적이고 민주적인 사고를 하는 인물이다. 인품과 덕망이 뛰어나며 만주와 김제평야 일대에서 투쟁의 권위자로 이름이 높다. 관동군 총사령관 살해 음모로 관동군에게 잡혀 1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옥사한다. 독립 투쟁의 계보가 의병 활동에서 만주 독립군 항쟁으로 이어짐을 확인해 주는 인물이다.
큰아들 송중원은 문학청년으로 고등보통학교 시절 창가 보급 운동을 하였고, 3·1운동에 가담했다가 2년간 옥살이를 한다. 경성잡지사에서 편집장으로 일하다가 민동환이 친일로 기울자 사직하고 귀향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우회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펼친다.
둘째 아들 송가원은 형 송중원의 뜻에 따라 경성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다. 아버지의 옥바라지를 위해 만주로 가서 의사로서 독립운동에 참가하는 적극적이며 투쟁적인 인물이다.
3. 차득보와 차옥녀 남매
차득보는 아버지가 총살당하고 어머니마저 자살하자 동생 옥녀와 거지로 떠돌이 생활을 한다. 김제 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할 때 승려 공허와 인연을 맺고 신세호의 집안일을 도우면서 살아간다. 동생 옥녀가 소리를 하여 번 돈으로 논을 사 주어 자작농이 된다.
공허의 중매로 결혼하지만 신혼 초에 징병으로 끌려가서 일본 도로 공사장에서 노역하다가 탈출하여 아이누족의 도움으로 피신한다.
차옥녀는 부모와 사별한 뒤 오빠 차득보를 따라다니다가 주모의 꼬임으로 놀이패에 넘겨진다. 중간에 도망쳐서 명창의 수양딸이 되어 소리를 전수받고, 오빠를 찾은 뒤 남원 명창 대회에서 장원하여 오빠에게 논을 사 주기도 한다.
만주에서 독립군에 가담하여 송가원이 진료할 때 간호사로 충실하게 내조한다. 주관이 뚜렷하고 당차지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다소곳한 여인으로,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더욱더 단단해지는 조선 여자 특유의 기질을 지닌 인물이다.
4. 그 밖의 인물들
공허는 동학농민군의 아들로 동학농민운동 당시 집안이 몰살한 핏빛 기억을 안고 의병 활동과 독립운동을 위해 잠행과 테러의 삶을 살아간다. 압록강 변에서 일본 수비대에게 발각되어 피살된다.
지삼출은 머슴 출신으로 감골댁 남편과 함께 동학농민군으로 투쟁했던 전형적 투사이다. 감골댁과 서로 가족처럼 의지하면서 살며, 평생 동안 송수익의 옆에서 분신처럼 보좌한다.
손판석은 지삼출과 함께 의병 활동을 하다가 붙잡혀 신작로 공사장에서 노역하다가 탈출하여 군산 부두 노동자로 일한다. 중국인 노동자들과 일자리 다툼을 벌이다 다리 불구가 되자 지삼출 등이 만주로 이주할 때 떠나지 못하고 군산에 남는다. 공허의 독립군 연락책으로 계속 활동하며 방보름을 낙미쓸이로 취업시켜 주기도 한다.
천수동은 초기 의병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의병이 해산되자 후일을 기약해 화전민으로 숨어 산다. 독립투사인 송수익을 따라 만주로 가서 그의 지지자가 된다. 박건식은 아버지가 죽자 소작농으로 전락하지만 토지를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한다. 만세 운동에 가담하여 일인들의 집에 불을 지르다가 수배를 당하자 목포로 피신하여 노무자로 살아간다.
박병진은 자작농 출신으로 일본의 토지 조사 사업에 피해를 입은 외리마을 대표로 항의하다 투옥된다. 토지 조사 사업으로 조선 농촌 사회가 파괴되고 농민이 분해되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전형적인 농민의 대표 인물이다. 배두성은 의병 활동을 하다가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화전민촌으로 피신했을 때 손필녀와 결혼하고 송수익을 따라 만주로 떠난다.
신세호는 유림 출신으로 얼마간은 우유부단하고 인습적이며 보황주의자였지만 송수익의 활동과 신채호의 책에 감명을 받고 진보주의자로 각성한다. 송수익과는 다른 형태로 독립운동을 하면서 나름대로의 헌신적인 삶을 산다. 노년에는 기행으로 ‘오줌대감’이라는 존경이 담긴 칭호를 받기도 한다. 김춘배는 박병진과 함께 내촌마을 대표 지주로서 토지 조사 사업을 반대하다가 투옥된다. 박건식과 함께 김제 장터에서 만세 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게 피살된다.
[『아리랑』의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는 아리랑문학관]
2003년 5월 16일 개관한 아리랑문학관은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용성리 226-23번지[용성1길 24] 김제시 벽골제 박물관 단지 안에 있다. 총 면적은 422.49㎡이며, 3개의 전시실에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의 원고와 시각 자료 등 『아리랑』과 작가 조정래 관련 자료 350점이 전시되어 있다.
제1전시실에 작가의 집필 원고·시각 자료·영상 자료, 제2전시실에 작가의 취재 수첩·노트·일상용품이 전시되어 있고, 제3전시실은 작가의 인간적인 면면들을 느낄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아리랑문학관은 조정래의 작품 『아리랑』과 작가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살아 있는 문화 공간일 뿐만이 아니라 민족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교육의 장이기도 하다. 매년 1월 1일과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
아리랑문학관에서는 다음과 같은 인상 깊은 문구를 만날 수 있다. “아리랑은 모든 이념과 종교를 초월하는 우리 민족의 넋이다. 단순하면서도 애잔한 가락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을 극복하며 굽이치고 흘러 온 우리 민족사의 강물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