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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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The Last Silhak Doer, Haehak Yi Gi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나종우 |
[개설]
이기(李沂)는 1848년(헌종 14) 6월 5일 전라북도 김제 만경[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에서 이택진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백증(伯曾)이다. 호는 해학(海鶴)·질재(質齋)·재곡(梓谷)·효산자(曉山子) 등인데, 이기는 스스로 남악거사(南嶽居士)라고 부르기를 즐겨했다.
성리학(性理學)을 공부하였으나 용감하게 보수적인 사상을 털어 버리고 근대적 개혁 사상을 받아들여 봉건적인 제도의 개혁과 신문물의 도입을 역설하였고, 온 나라 백성들이 정신적으로 빨리 깨우쳐 외세가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외쳤다.
실천적 실학자이자 새로운 시대를 추구한 선각자로서 계몽 운동을 벌이는 데 온 힘을 다하였고, 막강한 힘으로 이 민족을 압박해 오는 일제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구원하고자 노력했던 위대한 애국자였다.
[천품적인 기질과 총명을 지닌 문장가]
7세 때부터 시골의 사숙(私塾)에 들어가 학문을 닦아 12~13세경에는 칠서(七書)를 읽었고, 15세에 향시(鄕試)에 나아가면서부터 뛰어난 재주와 명성이 여러 고을에 알려졌다. 이기는 이때 이후로 성리학 외에도 천문(天文), 지리(地理), 음양(陰陽), 복책(卜策), 병복( 兵卜) 등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기 시작하였다.
이기는 뛰어난 문장가로 이름을 널리 떨치면서 당시 유명한 선비들과 교유하였고, 특히 호남의 대문장가인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 이기의 오랜 학문적 친구인 매천(梅泉) 황현(黃玹)과 가깝게 지내어 세간에서는 세 사람을 호남의 삼재(三才)라고 일컬었다.
이건창(李建昌)은 “백증[해학]의 문장은 비단결 같다.”고 하였고, 황현은 “웅매초려(雄邁抄驪)한 기질에 혼기변박(魂奇辯博)한 문장 실력을 가졌다.”고 높이 평가하였으며, 이정직은 해학의 문장을 가리켜 “허자한구(虛字閒句)가 마치 꽃부리와 같고 정백미(精白米)의 곡식 같으며 온윤전아(溫潤典雅)하다. 이기는 남쪽 지방의 큰 문장가인 황현에 버금가는 인물로 본다.”고 평가하였다.
[이기의 학문 세계와 구국 운동]
이기는 철저하게 시세에 맞고 실용적인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다. 이 같은 학문 세계는 일찍이 스스로 『반계수록(磻溪隧錄)』과 『경세유표(經世遺表)』를 접하여 유형원(柳馨遠)과 정약용(丁若鏞)을 학문적 스승으로 모시면서 더욱더 성숙해졌고, 교육관도 이러한 사상적 배경 속에서 확립되었다.
이기는 나라를 구하는 활동을 할 때도 저항의 일선에서 활약하였다.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저항은 아무런 뜻이 없음을 꿰뚫어 알아차렸던 것이다. 이기의 이런 면에 대해서 가장 친한 벗인 매천은 ‘행동적 저항주의자’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이기는 동학군 최고 지도자인 전봉준(全琫準)을 찾아가 이런 기회가 왔을 때 동학군을 이끌고 서울에 올라가 간사한 꾀를 부리는 민씨 일당을 물리치고 임금을 받들어 국가의 질서를 새롭게 하자는 뜻을 전했다. 전봉준은 이기의 뜻에 호응하여 남원에서 동학군을 지휘하던 김개남(金開男)[金介南]과 협의하도록 하였으나 협의는 실패로 돌아갔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노골적으로 조선에 침투하여 정세가 더욱 어려워졌다. 정치적 변화를 감지한 이기는 48세인 1895년 마침내 서울로 올라가서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어윤중(魚允中)을 만나 ‘전제망언(田制妄言)’이라는 전제개혁안(田制改革案)을 제시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08년 양지아문(量地衙問) 이 설치되었고 이기는 양지위원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904년(고종 37) 5월 31일 일제는 대한경영안(對韓經營案)을 의결하고 침략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기는 네 차례에 걸쳐 고종에게 ‘논일인소구진황지소(論日人所求陳荒地疏)’를 올려 황무지를 강제로 빼앗으려 하는 일본 사람들의 행동이 이치에 맞지 않음과 이에 대처할 계획을 제시하였다.
또한 홍필주(洪弼周)·이범창(李範昌) 등 수백 명의 사람들과 더불어 고종에게 글을 올려서 일본에 동조하던 이하영(李夏榮)·현영운(玄映運) 등을 결단하여 처치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선언서를 발표하여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뒤,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강화회의가 미국 포츠머스에서 열렸다. 이때 이기는 뜻을 같이했던 동지들과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 달라는 호소를 하려고 마음먹었으나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勸助]의 방해로 여권이 나오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미국행에 실패한 이기, 나인영(羅寅永), 오기호(吳基鎬), 홍필주 등은 그해 8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기는 일본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일본 정계 요인들에게 동양 평화를 위하여 한국·청·일본 3국이 동일하게 행동하기로 맹세할 것을 주장하고,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기 일행은 또 일본 정부에도 편지를 보내어 한국의 독립과 영토의 주권에 대한 모든 조약과 선언을 믿음과 의리로써 지키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기 일행의 눈물겨운 외교적 투쟁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해 11월 국내에서 소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던 것이다. 이기 일행은 이 사실을 알고 12월 귀국하여 이전보다 세차고 사납게 일제와 맞서 싸우는 일을 펼쳐 나갔다.
[구국 단체의 조직]
1906년(고종 38)에는 장지연(張志淵), 윤효정(尹孝定) 등과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고 『대한자강회 월보』 창간호부터 10호까지 24건의 글을 써서 국민 계몽에 앞장섰다.
1907년 동지 나인영·오기호·윤주찬·김인수 등 10여 명과 협의하여 결사대인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고, 대의와 단결의 필요성을 드러내어 밝히는 자신회의 근본 목적을 밝힌 글을 직접 지었다.
이기는 같은 해에 호남학회를 조직하여 교육부장으로 활동하면서 1908년부터 발행한 『호남학보』에 서문을 비롯한 많은 논설을 발표하였고, 『조양보(朝陽報)』와 『야뢰보(夜雷報)』에도 서문을 실어 정치하는 사람과 국민이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고 외쳤다.
그리고 민족의 주체 의식을 높여 나가기 위해서 단군(檀君)을 믿고 받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한자강회 회원이던 계정수(桂廷壽), 이정보(李廷普), 김효운(金孝雲) 등과 함께 단학회(檀學會)를 조직하였다.
[이기의 정치사상]
이기의 학문 세계는 반계(磻溪)나 다산(茶山) 같은 실학의 계보를 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선의 모든 학문은 성리학적 좁은 시야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으나 이기는 오랜 봉건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시무(時務), 진취(進取)에 핵심을 두고 모든 사람은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서 생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기는 입헌 군주제의 정치 체제를 주장하였다. 이기가 주장했던 입헌 군주론은 당시 지식층들이 판단하여 알고 있던, 국가의 대권(大權)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군왕이 그 뜻을 모아서 대표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와는 사뭇 달랐다.
이기는 공화제를 정치적 이상으로 하되 우선은 전제 정치에서 한 걸음 나가 입헌군주제를 실시하여 순서를 좇아 서서히 밀고 나가면서 왕의 권한에 조건을 붙여 제한하고 백성들의 권한을 확립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 국가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제도를 개혁해서 백성들의 지식수준을 높이고 국가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기의 활동에서 또 하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자강(自强)을 위한 계몽 활동이다. 이기가 생각하는 자강은 독립 정신을 바탕으로 한 자강이었다. 독립을 바탕으로 한 자강만이 국권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기는 개혁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적극적이었지만 일본의 경제적인 지원에 힘입어 개혁을 서두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지적하고, 외국의 빚을 끌어들여서 개혁을 하여서는 안 된다는 차관망국론(借款亡國論)을 주장하였다.
[이기의 교육 사상]
이기는 교육의 으뜸가는 뜻을 ‘국권 회복’에 두고 교육을 통하여 자강, 자급(自給)의 실력을 길러서 나라를 지키자고 주창하였다. 문명 문화와 자강 부강의 기초는 교육에 있다는 생각은 당시 남보다 세상을 앞서 보았던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당시의 신지식인(新知識人)들은 신교육을 통하여 나라를 구하는 길을 국가의 권리를 회복하는 지름길로 여겼던 것이다.
이기의 신학문을 공부하여 독립 정신으로 사대주의를 깨뜨리고, 국문으로 한문을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라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는 국민의 의식 구조가 근대화되어야 하며, 그러하기 위해서는 민중을 계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국어 국자 운동으로 나타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