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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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Geumsan Church Remained Paleochristian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290-1[모악로 407]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승대 |
[개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6호로 지정된 금산교회(金山敎會)는 1905년 미국 선교사 테이트(Lewis Boyd Tate)가 처음 세운 뒤, 1908년 새 건물을 마련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다. 교회 건물은 한옥으로 ㄱ자형인데 이러한 건축 구조는 남녀 신도의 자리를 분리하기 위한 것으로, 당시 남녀유별이라는 전통 사회의 관습을 해치지 않으려는 방안이었다.
[개화기 전라북도 지역의 개신교와 ㄱ자형 교회]
1882년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이후 개신교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선교사들은 의료 사업과 교육 사업을 앞세우고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선교 지역 분할 정책에 따라 전라북도 지역은 미국 남장로교회의 선교 구역에 속하였다.
전라북도 교회의 역사는 남장로교회에서 선교사를 전주에 파송하고 성문 밖 은송리에 주택을 매입하여 선교부[현재 서문교회 전신]를 열면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매입한 주택을 개조하여 사용하다가 교세가 늘어나자 증축하였고, 1905년에 지금의 위치에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건물 형태는 장방형이며 벽체는 붉은 벽돌로 쌓았고 지붕은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이다. 그 후 전국적인 대 부흥 운동이 일어나며 교인 수가 급증하자 기존의 건물에 새로운 건물을 덧붙여 ㄱ자형이 되었다. ㄱ자형 교회는 남녀 신도석을 양 날개로 분리하고 꺾어지는 중앙부에 강단을 배치한 결과였다.
이와 같은 ㄱ자형 교회는 남녀유별의 문제를 평면적으로 완전히 구분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기독교가 전래되던 초기에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의 부흥에 따른 재건축 등으로 ㄱ자형 교회는 거의 사라지고 현재 전라북도 지역에서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의 금산교회와 익산시 성당면 두동리의 두동교회가 남아 있을 뿐이다.
[초기 기독교의 토착화 과정을 보여 주는 금산교회]
금산교회는 1908년 전주선교부의 테이트 선교사가 지은 한옥 교회이다. 조선 예수교 장로회의 사기(事記)에 따르면, 1905년 5칸 건물을 지었다가 1908년 배재에 있던 이씨 문중의 재실을 사서 지금의 자리에 옮겨 지었고, 1988년 교회 옆에 교회 본당과 사택을 새로 지었다.
건물 형태는 남북 방향의 5칸 건물에 동쪽으로 2칸을 덧붙여 뒤집힌 ㄱ자 형태를 이룬다. 내부는 통칸이며, 북서쪽 모서리에 있는 약 16.53㎡[약 5평]의 강단을 2단으로 꾸며 결과적으로 3층 구조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 전래의 제단 구조이면서 동시에 ‘뜰, 성소, 지성소’로 이루어지는 성막의 3중 구조를 상징하고 있다. 강단 뒤쪽에는 목사들이 드나들던 조그마한 쪽문이 있다. 이 문을 지나려면 자연스럽게 몸을 숙여야 하는데, 목회자들은 이 문을 드나들면서 겸손을 배웠다고 한다.
신도석은 강단 오른쪽에 남자석, 왼쪽에 여자석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 같은 구조는 한국 초기 교회 건축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형태로 건물을 ㄱ자형으로 설계하여 남녀가 떨어져 앉아 예배를 볼 수 있게 함으로써 남녀가 유별했던 당시의 정서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방안이었다. 처음에는 남녀가 서로 바라보지 못하게 커튼을 드리웠으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 1940년대에 거두었다고 한다.
금산교회는 한국 기독교 초창기 ㄱ자형 교회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통 건축 양식과 서양식 교회의 특징을 조화롭게 결합시켜 초기 교회 건축의 한국적 토착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건물로, 건물 각 구조물의 보존 상태가 좋아 1997년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6호로 지정되었다.
[금산교회와 이자익 목사]
1. 이자익과 조덕삼의 만남
1904년 테이트 선교사가 설립한 금산교회는 옛날에는 팟정이교회·팟정리교회·두정리교회(豆頂里敎會)로 불렸다. 금산사 바로 코앞에 있는 이곳은 예부터 팟정이[두정리]라 불렀는데, 서울로 가려면 이곳에서 말을 빌려 팟정이를 지나 청도리와 유곽을 거쳐 재를 넘어가야 했다. 그 때문에 팟정이에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테이트 선교사도 조랑말을 타고 팟정이로 와서 선교 활동을 펼치면서 조덕삼(趙德三), 이자익(李自益), 박화서(朴化西), 왕순칠(王巡七) 등을 만나 전도하고 조덕삼의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금산교회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자익은 경상남도 남해 출신으로 6세 때 부모를 잃고 친척 집에서 성장했다. 16세가 될 때까지 열심히 일했지만 가난을 면치 못하자 집을 떠나 하동으로 갔다. 하지만 하동에서도 있을 만한 곳을 찾을 수 없어 전라도 남원과 전주를 거쳐 김제 금산리 삼거리에 도착하였다.
이자익은 삼거리에서 똑바로 가면 유명한 금산사가 있었으나 그 길로 가지 않고 두정리 쪽으로 발걸음을 돌려 가장 큰 집을 찾았다. “여보세요, 주인 어르신 계신가요? 저는 경상도 남해도란 섬에서 왔는데 주인 어르신을 뵙고 여쭐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주인인 조덕삼은 이자익을 안으로 들여 사정 이야기를 듣고는 딱하게 여겨 당장 일감을 주었는데 바로 마부 일이었다. 이자익은 열심히 일하면서 테이트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전주선교부를 오가며 성경을 배우고 매 주일마다 사랑채에서 예배를 올리면서 신앙을 키워 나갔고, 조덕삼·박희서 등과 함께 금산교회에서 테이트의 집례로 세례를 받았다.
2. 금산교회 장로에서 목회자의 길로
금산교회는 해가 지나면서 교인들이 늘어나자 1908년 장로를 선출하였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지주인 조덕삼이 장로로 선출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머슴이며 마부인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된 것이다. 마부가 장로가 되었다는 소식이 금산 지역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금산교회로 몰려 왔다.
이때 조덕삼이 자신의 배밭 일부를 교회에 기증하자 힘을 얻은 테이트 선교사는 이자익과 의논하여 교회당을 신축하기로 하였다. 조덕삼은 또 모악산 중턱에 있는 제각을 판다는 소식을 듣고 그 제각을 사들이기도 하였다.
1908년 3월 남녀 신도석을 따로 갖춘 교회당이 완성되어 당회장인 테이트의 집례로 헌당식을 치렀다. 다음 주일부터 여자 신도석에서 따로 예배를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여성들이 모여 들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소문은 곧 금산리뿐만 아니라 원평에도 전해져 원평에서도 사람들이 모여들였다.
한편 용화동에 살고 있는 사람이 이자익을 좋게 보고 자신의 딸과 결혼시키고 논 다섯 마지기까지 내주었으나 장로가 된 이자익은 목사가 되고자 장인에게서 받은 논을 팔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 조덕삼은 이자익의 학비는 물론 기숙사비도 지원해 주었다.
이자익은 신학을 공부하면서 임실 지방의 순회 조사로 활약하였고, 1909년부터는 전라북도를 대표해서 황운성·최태국·김필수·최흥서 등과 함께 총회 대의원으로 활동하면서 흥덕·남원 지방의 조사를 겸하였다.
1915년 입학한 지 7년 만에 신학교를 졸업한 이자익은 전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뒤 김제군 구봉리교회와 금산교회의 목사로 청빙되었고, 남장로교 선교부는 이자익을 인정하여 고부·정읍·고창·김제 지역을 선교 구역으로 할당하여 주었다. 조덕삼은 이자익의 뒤를 따라 다시 금산교회의 장로가 되었는데, 1919년 세상을 떠났고, 아들 조영호가 뒤를 이어 장로가 되었다.
1917년 이자익은 원평교회의 전신인 구봉리교회로 전임하였다. 구봉리교회는 구봉리에 사는 정창화·김기환이 구봉리에서 금산교회까지 먼 거리를 다니자 테이트 목사와 이자익이 이들을 위해 세운 교회이다. 이자익이 부임한 뒤 구봉리교회는 크게 발전하였고, 원평들의 많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이 신자가 되었다.
이자익은 특히 법 이론에 밝아서 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법통으로 전국에 이름을 떨쳤고, 그에 힘입어 1924년 교세가 강한 이북 지역의 인사를 물리치고 제13대 총회장에 당선되었다. 이후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총독부의 간섭에 저항하면서 교회를 잘 이끌어 33대, 34대 총회장에 연이어 선출되어 이 방면의 신화를 창조하였다.
구봉리교회에서는 김준기(金準基)가 장로로 시무하면서 이자익을 보필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구봉리보다 원평리에 사는 신도들이 늘어나자 김준기는 이자익과 상의하여 교회를 원평으로 옮기고 교회 이름을 원평교회로 고쳤다. 김준기는 전라북도에서 장로 출신으로는 최초로 노회장을 역임하였다.
1949년 이자익은 대전성경학교를 세워 교장으로 취임하였고, 1952년에는 대전노회를 조직하여 첫 노회장이 되었다. 1954년에는 대전신학교를 세워 교장으로 추임하였고, 만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제2의 고향인 원평에서 여생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