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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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Gimcheon's Culture and Artists, and Gimcheon in Literary Works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집필자 | 권숙월 |
[영남 제일 문향의 배경]
김천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일컫는 상징어가 삼산이수(三山二水)라면 찬란했던 김천의 문화 예술을 표현하는 상징어는 단연 영남 제일 문향(嶺南第一文鄕)이라 할 것이다. 김천 지방은 삼한 시대 감문국(甘文國)으로부터 신라, 고려 시대에 이르기까지 편리한 교통을 배경으로 전략적 요충지로서 위상을 유지했는데 특히 고려 7대 목종은 군호(君號)를 김천의 옛 지명의 하나인 개령을 따서 개령군(開寧君)으로 삼았을 만치 김천은 고대로부터 중심 고을로서의 면모를 갖춘 큰 고을이었다.
본격적으로 김천의 문화, 예술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은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개국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역성혁명에 반대하며 많은 관리들이 새로운 정부에 몸담기를 거부하며 저항할 때 김천이 은거지로 선택되면서 이로부터 김천의 문풍(文風)이 크게 진작되었다.
전의 이씨 김천 입향조로 종4품 사재시감(司宰寺監) 벼슬을 버리고 김천 아포로 낙향한 이사경(李思敬), 종4품 서운관도정(書雲觀都正) 벼슬을 버리고 김천 조마로 낙향해 수원 라씨 김천 입향조가 된 라만(羅蔓), 정3품 공조전서 벼슬을 버리고 김천 부항으로 낙향해 벽진 이씨 김천 입향조가 된 이존인(李存仁), 정6품 문하성좌정언(門下省左正言) 벼슬을 버리고 김천 감문으로 낙향해 성산 이씨 김천 입향조가 된 이여랑(李汝浪), 정3품 승지(承旨) 벼슬을 버리고 김천 삼락동으로 낙향해 수원 백씨 김천 입향조가 된 백귀선(白貴旋), 정2품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벼슬을 버리고 김천 봉계로 은거해 서산 정씨 김천 입향조가 된 정윤홍(鄭允弘), 종6품 사직(司直)으로 있다가 대항면으로 은거해 해풍 김씨의 김천 입향조가 된 김효신(金孝臣), 종4품 문하성기거주(門下省起居注)로 있다가 지례로 낙향해 옥산 장씨 김천 입향조가 된 반곡 장지도(張志道)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조선 개국 초기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음에도 끝내 나아가지 않고 은거지에서 제자들을 길러내면서 김천을 영남의 제일가는 문향으로 발돋움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특히 백귀선, 정윤홍, 김효신은 김산삼절(金山三節)로 추앙을 받으며 김천의 자부심을 크게 고양시켰는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의리를 지킨 대학자들이 김천 지방에 정착함으로서 김천은 학문이 주도하는 문향으로 세풍(世風)이 바뀌고 이들의 후손과 제자들이 조선 초기 대거 관직에 나아가면서 김천 지방의 문향 조성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또 조선 전기 정몽주(鄭夢周)와 길재(吉再)의 학맥을 이어 영남 사림을 이끌던 김숙자(金叔滋)가 개령현감으로 김천에 머물고 아들 김종직(金宗直)이 김천 봉계로 장가를 들면서 처향(妻鄕)인 김천에 서당을 개설하고 조위(曺偉), 김시창(金始昌), 정이교(鄭以僑), 이약동(李約東), 이한보(李漢輔)와 같은 많은 제자를 길러내어 또 다시 김천의 문풍이 크게 진작되었다. 그러나 연산조에 들어 무오사화, 갑자사화로 김천 출신 문인들이 대거 죽임을 당하면서 김천은 문향으로서의 위상이 크게 흔들리기도 했으나 뿌리 깊이 스민 영남 제일 문향으로서의 바탕은 문화, 예술혼으로 승화되어 많은 예술인을 배출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김천 예술인의 맥을 따라]
1. 전통 시대
왕조 시대의 문화, 예술인은 문학적, 예술적 소양을 갖춘 사대부가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었는데 대개의 예술적 구현은 시(詩)·서(書)·화(畵)로 표현되었고 김천 지방은 주로 시문(詩文)으로 대표되는 문학이 주류를 이루었다.
김천 문학은 기록상으로 고려 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지금의 김천시 아포읍 대신리 한골에 은거했던 서하(西河) 임춘(林椿)이 시초이다. 임춘은 무신 정권으로부터 핍박을 받으며 김천에 은거했을 때 가전체 소설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국순전(麴醇傳)」과 「공방전(孔方傳)」을 집필하며 김천 문학의 원조를 형성하였다.
역성혁명에 반발해 김천으로 낙향한 이사경과 장지도는 서당을 개설하고 제자들을 길러냄과 함께 많은 시문을 지었고 선조 때의 역관(譯官) 임기(林芑)는 명나라에서 『전등신화(剪燈神話)』를 처음 들여와 해석을 거쳐 보급하였다.
성균관대사성을 지낸 최사로(崔士老)는 뛰어난 시문으로 『여지승람(輿地勝覽)』에 두 편의 시가 실렸고 이조참판을 지낸 이숙함(李淑咸)은 서거정(徐居正)과 함께 『신편동국통감(新編東國通鑑)』을 편찬하였다. 제주부사를 지내고 청백리에 오른 이약동과 사헌부감찰 권응시(權應時)는 문장으로 이름을 높였고 전만령(全萬齡)은 그 문장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밀양 태생이지만 김천에서 초년과 말년을 보내고 형조판서를 지낸 영남 사림의 영수 김종직은 『점필재집(佔畢齋集)』과 『청구풍아(靑丘風雅)』 등을 저술했고 김종직의 처남으로 도승지를 지낸 조위는 당나라 두보(杜甫)의 시를 최초로 언해한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와 유배 가사의 효시인 「만분가(萬憤歌)」, 『매계집(梅溪集)』 등을 저술해 우리 국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또 동생인 조신(曺伸)은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 편찬 작업에 참여해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편찬의 기초를 제공했고 『적암시고(適庵詩稿)』와 『수문쇄록(搜聞瑣錄)』, 『백년록(百年錄)』을 남겼다. 조선 말에 들면서 한글 가사 문학도 활발히 발표되었는데 특히 고종 때의 상궁으로 말년에 사재를 헌납해 김천고등보통학교[현 김천중고등학교]를 설립한 최송설당(崔松雪堂)은 『송설당집(松雪堂集)』을 남겼다.
2. 근대
근대 문학은 일제 강점기의 문학으로 볼 수 있는데 김천에서는 1920년대부터 문학 활동이 전개되었다. 김태은(金泰殷)은 동인지 『무명탄(無名彈)』을 발간하는 등 김천 최초의 근대 시인으로 활동하며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1930년대에는 민동선(閔東宣)이 불교적 색체가 강한 시조를 발표했고 1939년에는 김천 출신 김연만(金練萬)이 중앙의 문예지 『문장(文章)』을 인수해 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1940년대에는 김천중학교 교장으로 있던 정열모(鄭烈模)가 지역의 문학 부흥과 한글 연구에 족적을 남겼다.
3. 현대
광복 후부터 1960년대까지 다양한 문학 단체가 등장하여 김천 문학의 번성기를 구가했는데 1947년 오동시문학구락부(梧桐詩文學俱樂部)가 그 시초이다. 뒤를 이어 김천문화의 집, 흑맥문학회(黑麥文學會), 김천문우회(金泉文友會), 김천시문학회(金泉詩文學會) 등이 김천의 문학을 이끌었다. 이들 문학회에 참여한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강중구(姜重求), 홍성문, 이정기, 김기환, 정수봉, 정완영(鄭椀永), 민동선, 박재호, 여석기, 임성길, 김상민, 정재호, 김상문 등이 있었다.
특히 김천문화원의 전신인 김천문화의 집은 당시 김천의 유일한 문화 예술 종합 단체로서 문학, 음악, 미술, 사진 등 모든 문화 예술 활동을 전개하며 김천 문화 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거점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는 김천의 시조 문학이 활발히 전개되어 김천을 시조마을로 불리게 했는데 정완영, 조오현(曺五鉉), 김남환 등이 중심인물이다. 그중 정완영은 1974년 시조 「조국(祖國)」이 교과서에 실리면서 전국적인 시조 시인으로 명성을 얻었다. 1970년대 이후 김천시문학회(金泉詩文學會), 김천문학회, 파지동인회(破紙同人會), 한국문인협회 김천지부, 은유문학회 등의 문학 단체가 창립되면서 김천의 문학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김천 출신으로 1980년대 이후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문학인으로는 이동순, 이승하, 문태준, 김연수, 김중혁 등을 들 수 있다. 시인 이동순은 1950년생으로 경북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마왕의 잠」이 당선된데 이어 198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 평론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동안 시집 『개밥풀』, 『물의노래』, 『지금 그리운 사람은』, 『철조망 조국』, 『그 바보들은 더욱 바보가 되어간다』, 『꿈에 오신 그대』, 『봄의 설법』, 『가시연꽃』, 『기차는 달린다』, 『아름다운 순간』, 『마음의 사막』, 『미스 사이공』, 『발견의 기쁨』과 평론집 『민족시의 정신사』, 『시정신을 찾아서』, 『한국인의 세대별 문학의식』,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달고 맛있는 비평』, 산문집 『시가 있는 미국기행』, 『실크로드에서의 600시간』, 『우리 시의 얼굴 찾기』 등을 발간하였다. 난고 문학상, 시와 시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시인 이승하는 1960년생으로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화가 뭉크와 함께」가 당선된데 이어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비망록」이 당선되어 화려한 등단을 하였다. 시집 『사랑과 탐구』,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 『폭력과 광기의 나날』,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 『취하면 다 광대가 되는 법이지』, 『천상의 바람 지상의 길』과 시론집 『한국현대시와 풍자의 미학』, 『생명 옹호와 영원 회귀의 시학』, 『한국 현대시 비판』, 『한국현대시에 나타난 10대 명제』, 『세계를 매혹시킨 불멸의 시인들』, 『한국시문학의 빈터를 찾아서』 등이 있다. 대한민국 문학상, 지훈 문학상, 중앙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시인 문태준은 1970년생으로 고려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94년 『문예중앙』 신인 문학상에 시 「처서」 외 9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며 시집 『수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과 수필집 『느림보마음』을 발간하였다. 동서 문학상, 노작 문학상, 유심 작품상, 미당 문학상, 소월시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소설가 김연수는 1970년생으로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시를 발표한데 이어 1994년 장편 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작가세계 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가의 길을 걸어왔다. 그동안 『꾿빠이 이상』,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7번 국도』, 『사랑이라니, 선영아』,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스무 살』, 『세계의 끝 여자친구』 등의 소설책을 발간했으며 동서 문학상, 동인 문학상, 대산 문학상, 황순원 문학상, 이상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소설가 김중혁은 1971년생으로 계명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2000년 『문학과 사회』에 중편 소설 「팽귄뉴스」를 발표하며 등단해 소설집 『팽귄뉴스』, 『악기들의 도서관』과 장편 소설 『좀비들』을 발간했으며 김유정 문학상, 젊은 작가상 등을 수상하였다.
[문학 작품 속에 구현된 김천]
작품에 표현되는 공감각적 색채는 필연적으로 작가의 독특한 경험과 태생적 배경, 가족관계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김천 출신 또는 지역에서 활동한 작가들 또한 김천이라는 향토색 짙은 유무형의 환경과 개인의 가족사를 기저(基底)로 한 독창적인 문학 세계를 구현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부유한 출신 배경과 강좌칠현(江左七賢)의 한사람으로 불리며 당대를 풍미했던 임춘은 무신 정권으로부터의 탄압을 피해 타향인 김천 땅에 은거하면서 개인적인 울분과 한을 문학으로 토해냈다. 절친한 벗 이인로(李仁老)가 위로차 김천을 찾았을 때 감사와 마지막 남은 기개를 담아 읊은 시가 전한다.
그대 날 찾아 산을 나서니/ 길에 철장 끄는 쇳소리/ 많은 술 한골에 내려/ 한잔 술이 험한 산길 바꾸네/ 오래도록 좋은일 없이 양웅처럼 살렸더니/ 뜻밖에 글을 논한 이생을 만났구려/ 오래도록 시골에 묻혀 지내렸는데 / 어느 누가 도중에 도연명을 찾는가
조선이 개국하자 김천으로 낙향해 지조를 지킨 장지도는 고향 지례에 은거하면서도 조정의 부름을 거부하며 지은 시가 전한다.
천년의 반곡은 한 지경이 편편한데/ 깎아세운 앞산봉엔 돌성이 섰네/ 예부터 몇집이나 본토의 성씨던가/ 지금까지 여남은 집은 벼슬이름 얻었네/ 처마에 드리운 감과 밤은 산중의 진미요/ 구름에 갇힌 마루 속세밖의 풍경일세/ 좋은시절에 버려짐을 탓하지마라/ 한가한 나그네로 산수간에 지냄을
김종직의 처남이자 조위의 동생으로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조신은 김천을 무대로 흥망한 감문국의 역사를 노래하였다.
증속감문일부용(曾屬甘文一附庸)[일찍이 감문국의 한 고을이더니]
시분도첩작뢰봉(始分圖牒作雷封)[비로소 도첩을 나누어 현이 되었네]
우금극군민번서(于今劇郡民繁庶)[오늘날 군민이 극히 번성함은]
위유선왕태실봉(爲有先王胎室峰)[선왕의 태실봉을 두어서였네]
김천 출신은 아니지만 김천의 역사와 공간을 배경으로 작품을 남긴 이로는 주세붕(周世鵬), 서거정(徐居正), 강혼(姜渾), 유득공(柳得恭), 김병연(金炳淵) 등이 있다.
다음은 주세붕의 작품이다.
감문고국신추우(甘文故國新秋雨)[감문국 옛 터에 초가을 비 내리는데]
백발풍기태수행(白髮豊基太守行)[백발의 풍기군수 이곳을 지나네]
진중동루쌍합주(珍重東樓雙榼酒)[동루에서 진중히 술잔 나누니]
백년청안사군정(百年靑眼使君情)[한 생애 친한 벗 사군의 정일세]
다음은 서거정의 작품이다.
난산귀로호고저(亂山歸路互高低)[돌고 도는 산길이라 높고 높은데]
행도부상정오계(行到扶桑正午鷄)[부상에 당도하니 낮닭이 우네]
운도한풍고영북(雲度寒風高嶺北)[찬바람에 구름은 재 넘어가고]
설잔유수단교서(雪殘流水斷橋西)[눈 녹은 개울물은 다리밖에 흐르네]
광음역여신여기(光陰逆旅身如寄)[천지를 시벽삼아 세월 속에 몸부치고]
기환타향사전미(羈宦他鄕思轉迷)[타향살이 매인벼슬 생각만 어지러워]
자소시광유고태(自笑詩狂猶古態)[우습다 시에 집착함은 예전처럼 남아]
벽간중검고인제(壁間重檢古人題)[벽장속 예전의 시를 다시 살펴보게 하는구나]
다음은 강혼의 작품이다.
부상관이일장환(扶桑館裏一場歡)[부상역의 한바탕 즐거움이여]
숙객무금촉신잔(宿客無衾燭燼殘)[나그네 이불도 없이 촛불은 재만 남았네]
십이무산미효몽(十二巫山迷曉夢)[열두 무산선녀 새벽꿈에 어른거린다.]
역루춘야부지한(驛樓春夜不知寒)[역루의 봄밤은 추운 줄도 몰랐구나]
다음은 유득공의 작품이다.
장비일거야화향(獐妃一去野花香)[장부인은 간지오래인데 들꽃은 향기롭다.]
매몰잔비거효왕(埋沒殘碑去孝王)[땅에 묻힌 낡은 비는 금효왕의 흔적]
삼십웅병추대발(三十雄兵酋對發)[크게 일으킨 군사 삼십명]
와우각상투천장(蝸牛角上鬪千場)[달팽이 뿔위에서 천 번은 싸웠으리]
다음은 김병연의 작품이다.
금오설적오두백(金烏雪積烏頭白)[금오라 했는데 눈이 쌓여 까마귀 머리가 희구나]
황악화개학두홍(黃岳花開鶴頭紅)[황악이라는데 꽃이 피어 학의 머리가 붉구나]
추풍령상춘화괴(秋風嶺上春花怪)[추풍령인데 봄꽃이 피어 괴이 하구나]
직지유중로곡하(直指由中路曲何)[직지라 했는데 꼬부랑길이 웬말이냐]
이밖에도 박종화(朴鍾和)는 역사 소설 「임진왜란」에서 추풍령 전투를 사실적으로 묘사했고 유주현(柳周鉉)도 「황녀」에서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와 향천리 일대를 배경으로 작품을 전개하였다.
고려 시대로부터 조선 시대를 거쳐 일제 강점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문학 작품에 김천의 역사와 문화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등장하고 있는데 본 원고에서는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진 김천 출신의 대표 현대 문인 중 김천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가장 잘 담아내고 있는 이동순 시인과 문태준 시인의 작품을 살펴보았다.
이동순 시인은 어려웠던 시절 시골에서 온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호박잎을 싸먹는 소박한 어린 날의 기억을 시 「호박잎」에 담아 발표하였다.
가난한 밥상 위에서/ 쓸쓸하게 차려내는 판잣집 아침 식사/ 무슨 별것인가 했더니 호박잎이네/ 똥개네 아부지/ 피어나지 못한 삶처럼/ 여기저기 담장 밑 둘레 아무 곳에나/ 힘겹게 제멋대로 돋아서/ 사립문 곁으로 기운차게 뻗어가는 한여름 아침/ 신 새벽부터/ 부지런히 길어다 물 부어주니/ 여기도 탱글 저기도 탱글 청보석처럼 빛나는 호박/ 아름다워라 사랑이여/ 상 위에 올라 드디어 자태를 뽐내는/ 한여름의 청춘이여/ 가난한 밥상머리에/ 똥개네 온가족 둘러앉아/ 구수한 된장에 푹 담구었다가/ 도란도란 이야기꽃 피워가며 한 장씩 쌈 싸먹는/ 감격의 호박잎이여
또 문태준 시인은 김천시 봉산면 태화리 철길 아래 작은 산골 마을에서 자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어려웠지만 소박한 시골 생활을 모티프로 한 작품 「극빈」을 남겼다.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흰 열무꽃이 파다하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 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가녀린 발을 딛고/ 3초씩 5초씩 짧게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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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2 | 금오신화 관련 오류 삭제. | 임기의 '전등신화' 도입이 '금오신화' 창작에 영향을 주었다는 서술 삭제. |
2011.07.18 | 2011년 한자 최종 검토 작업 | 1) 증속감문일부용(曾屬疳文一附庸)[일찍이 감문국의 한 고을이더니] ->증속감문일부용(曾屬甘文一附庸)[일찍이 감문국의 한 고을이더니] 2) 운도한풍고영북(雲道寒風高嶺北)[찬바람에 구름은 재 넘어가고] ->운도한풍고영북(雲度寒風高嶺北)[찬바람에 구름은 재 넘어가고] 3) 기관타향사전미(羈官他鄕思轉迷)[타향살이 매인벼슬 생각만 어지러워] ->기환타향사전미(羈宦他鄕思轉迷)[타향살이 매인벼슬 생각만 어지러워] 4) 자소시광고요웅(自笑詩狂古요熊)[우습다 시에 집착함은 예전처럼 남아] ->자소시광유고태(自笑詩狂猶古態)[우습다 시에 집착함은 예전처럼 남아] 5) 벽간중검고인제(壁間重撿古人題)[벽장속 예전의 시를 다시 살펴보게 하는구나] ->벽간중검고인제(壁間重檢古人題)[벽장속 예전의 시를 다시 살펴보게 하는구나] 6) 숙객무념촉신잔(宿客無念燭燼殘)[나그네 이불도 없이 촛불은 재만 남았네] ->숙객무금촉신잔(宿客無衾燭燼殘)[나그네 이불도 없이 촛불은 재만 남았네] 7) 김오설적오두백(金烏雪積烏頭白)[금오라 했는데 눈이 쌓여 까마귀 머리가 희구나] ->금오설적오두백(金烏雪積烏頭白)[금오라 했는데 눈이 쌓여 까마귀 머리가 희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