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62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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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尋軒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호 |
[정의]
조선 후기~근대까지 270년 동안 강릉 오죽헌을 다녀간 인사들의 방명록.
[개설]
1662년 권상하(權尙夏)를 시작으로 1932년 이항구(李恒九)까지 270년 동안 오죽헌을 다녀간 인사 1,149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 중 7명의 이름이 후대에 삭제되어 확인되는 인물은 모두 1,142명이다.
[편찬/간행 경위]
『심헌록(尋軒錄)』의 서문에 의하면, "대대로 후세에 전한 지 230여 년이 지난 정해년(丁亥年)[1707년] 옛 제도에 따라 거듭 꾸미고 [중략] 예부터 소장된 일기에 약간의 기록이 남아 있어 지난 자취가 어제의 일같이 생각난다. 그 자취와 행적이 없어질 것을 안타깝게 여겨 지금 옮기고 베껴 갖추어 놓아 후에 오는 사람들이 상고하여 볼 수 있도록 이 기록을 남겨 놓는다."고 하여 오죽헌이 중수되고 그 이후인 1766년경에 『심헌록』이 필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서지]
『심헌록』의 외부는 오침선장(五針線裝)으로 제책되어 있고, 표제는 '심헌록(尋軒錄)'이다. 첫 방문자부터 1767년까지 방문자 명단이 동일한 필체로 작성되었고, 이후부터 계선(界線)이 붉은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뀌고 필체가 변하는 등 변화가 있다. 『심헌록』을 필사한 원본 기록은 현재 확인되지 않는다. 분량은 198면이다.
[구성/내용]
『심헌록』은 서문에 이어 "화산(花山) 권상하(權尙夏) 임인(壬寅)[1662년]에 왔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1932년 이항구(李恒九)[1881~1945]까지 270년 동안 오죽헌을 다녀간 1,149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7명의 이름이 삭제되어 1,142명의 이름이 확인된다. 기록 내용은 방문자의 본관과 이름, 방문한 해의 간지(干支)를 기본으로 하고 있고, 혹 월일까지 적거나 방문 동기를 적기도 하였다. 한 면에 보통 6명의 인명이 수록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심헌록』에는 어떤 동기로 오죽헌을 방문하게 되었는지 간략히 기술한 부분이 있는데, 지방관 보임이나 관료로서 공무 수행 차 왔다가 방문하거나 관동 지방 유람의 목적으로 방문한 경우가 가장 많았다. 특히 1788년(정조 12) 정조가 오죽헌에 있던 이이(李珥)의 유품을 가져오라 하여 친람하고 어제어필(御製御筆)[왕이 창작한 작품과 직접 쓴 글씨]한 이후 오죽헌은 더욱 유명해져 관동 유람객이 크게 증가하였다. 어제(御製) 하사 시점인 18세기 후반이 오죽헌 방문객 추이가 가장 높은 정점에 이르는 시기였음은 『심헌록』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