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5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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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惟政 |
이칭/별칭 | 이환(離幻),사명(四溟),송운(松雲),종봉(鍾峯),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강호선 |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봉은사 주지로 천거되었던 조선 전기의 고승.
[가계]
1544년(중종 39) 10월 17일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임씨(任氏)이며 본관은 풍천(豊川)이고 자는 이환(離幻)이다. 법명은 유정(惟政), 법호는 사명(四溟) 또는 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峯)이다. 아버지는 임수성(任守成), 어머니는 서씨(徐氏)이다. 어려서 유교를 공부했고 1558년(명종 13) 직지사(直指寺) 신묵(信黙)에게 출가·득도하였다.
[활동 사항]
1550년(명종 5) 문정 왕후에 의해 선교 양종이 복립되면서 승과가 다시 실시되게 되었는데, 유정은 1561년 승과에 합격한 뒤 박순(朴淳)[1523~1589], 임제(林悌)[1549~1587] 등 당대의 유학자들과 교류하였다. 직지사 주지를 거쳐 봉은사 주지에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물러나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에 은거하던 휴정을 찾아가 3년간 참선에 몰두했다. 1578년부터는 전국을 다니며 선을 닦았고 1586년 옥천사 상동암에서 도를 깨쳤다. 1589년 오대산 영감사(靈鑑寺)에 있을 때 정여립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휴정과 함께 관아에 갇혔으나 무죄 석방되었다.
오대산에서 수도하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되자 휴정이 왕명을 받고 근왕(勤王)의 기치를 내걸고 격문을 띄워 승군을 소집하자 유정은 관동(關東) 지역에서 승군을 이끌고 일어났다. 유정은 휴정의 수제자로서 임진왜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승려로 명성을 떨쳤다. 강원도에서 800명의 승병을 모아 거병한 뒤 휴정을 대신하여 직접 전투에 참여하였고 산성 축조와 군량 조달 등 전쟁 지원 사업에서 큰 역할을 했다. 또한 휴정의 명으로 전쟁 중 통도사(通度寺)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보호하기도 했다. 특히 일본군과 강화 교섭 과정에서 조정을 대표하여 파견되었고 정세를 분석하여 대비책을 주달하기도 했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는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국교 재개 문제나 포로 쇄환 등 외교적 문제를 담당하였다. 1610년(광해군 2) 8월 26일 해인사에서 입적하였다.
[사상과 저술]
유정은 당대에 휴정의 수제자로 인정받았고 적전(嫡傳)으로서의 위상을 가졌다.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四溟堂大師集)』과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등이 전한다.
[상훈과 추모]
도총섭을 역임한 유정의 공은 선조에게 높이 평가되어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의 직책과 정3품 당상관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또한 선조는 1597년 정유재란 때의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를 제수하였다.
1610년 해인사에서 입적 후 해인사 홍제암(弘濟庵) 옆에 부도와 비가 제자들에 의해 세워졌다. 나라에서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의 시호를 내렸고 탑호는 종봉(鍾峯)이다. 전쟁 중 승병장으로 활약한 것을 높이 평가받아 18세기 휴정과 유정 등을 향사하는 사당이 국가 공인 사액사로 지정되었다. 유정을 주향하는 밀양 표충사는 1739년(영조 15) 왕명으로 사액되었고, 1789년 해남의 대둔사와 1794년 묘향산 수충사가 유정의 스승 휴정을 향사하는 사당으로 사액되자 유정은 휴정 옆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