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5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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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休靜 |
이칭/별칭 | 淸虛,白華道人,楓嶽山人,頭流山人,妙香山人,曹溪退隱,病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강호선 |
출생 시기/일시 | 1520년 3월 - 아버지 최세창, 어머니 최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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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서품 시기/일시 | 1540년 - 서산대사 휴정 수계 |
몰년 시기/일시 | 1604년 1월 - 나이 85세, 법랍 67세 |
출생지 | 평안도 안주 |
활동지 | 봉은사 -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삼성동 73] |
향사 | 밀양 표충사 -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표충로 1338[구천리 23] |
향사 | 해남 대둔사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구림리 799] |
향사 | 묘향산 수충사 -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
부도 | 묘향산 안심사 - 평안북도 영변군 북신현면 |
부도 | 금강산 유점사 - 강원도 고성군 서면 백천교리 금강산 |
부도 | 해남 대둔사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구림리 799] |
성격 | 승려|승군대장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선교양종판사|팔도선교도총섭|봉은사 주지 |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자리한 봉은사의 주지를 역임한 조선 시대 승려.
[개설]
1520년(중종 15) 3월 평안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완산(完山), 속성은 최씨(崔氏), 속명은 여신(汝信), 아명은 운학(雲鶴),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 법명은 휴정(休靜)이다. 아버지는 세창(世昌), 어머니는 김씨(金氏)이다. 10세 되던 해 부모를 여의고 안주 목사(安州牧使) 이사증(李思曾)의 양자로 입적된 뒤 이사증을 따라 서울로 올라와 성균관에서 3년 동안 학문을 익혀 과거를 보았으나 낙방하고 친구들과 같이 지리산 일대를 유람하며 여러 사찰에 기거하였다. 이 시기 부용영관(芙蓉靈觀)[1485~1571]의 설법을 듣고 불교를 공부하게 되었다. 이후 『전등록(傳燈錄)』,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등 여러 경전을 연구하던 중 숭인장로(崇仁長老)를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였다. 1540년(중종 35) 일선(一禪)을 수계사(授戒師)로 하여 계를 받았다. 그리고 영관에게서 인가를 받고 운수행각을 하며 공부에만 몰두하였다.
[활동 사항]
1549년(명종 4) 폐지되었던 승과(僧科)가 문정 왕후에 의해 부활되어 개최되자 이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이후 대선(大選), 중덕(中德)을 거쳐 1555년 교종판사에 이어 선종판사를 겸임했고, 선종본사 봉은사의 주지를 맡았다. 문정 왕후가 양 종 존속을 유언으로 남기고 세상을 뜬 이듬해인 1566년(명종 21) 양 종이 다시 혁파되고 보우가 제주도로 유배되어 장살당하자 휴정은 자신의 승과 참여와 선교 양 종 판사직을 맡았던 것에 대해 ‘산승(山僧)의 추사(醜事)’라 자평하며 모든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금강산, 오대산, 묘향산 등을 유력하며 도를 닦는 한편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으로 투옥되기도 했으나 무죄임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함경도 의주로 피난 간 선조가 사람을 보내 묘향산에 있던 휴정을 불러 나라를 구할 방법을 물었고 휴정은 곧 전국에 격문을 돌려 각 처의 승려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하였다. 임진왜란 때 휴정의 지휘아래 승려들이 근왕(勤王)의 기치를 내걸고 승군을 일으킨 공적은 이후 조정에서 불교의 역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불식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조선 후기 불교가 존립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사상과 저술]
휴정 불교의 특징은 간화선(看話禪) 우위의 선교겸수(禪敎兼修)를 들 수 있다. 그리고 휴정은 선, 교, 염불의 종합적 수행방향을 수립하였는데, 이는 경절문(徑截門), 원돈문(圓頓門), 염불문(念佛門)의 삼문으로 제시되었다. 이러한 방향성은 그의 문도들에 의해 계승되어 조선 후기 불교의 특징으로 자리잡았다. 저술로는 문집 『淸虛堂集』을 비롯하여 『선가귀감(禪家龜鑑)』, 『선교석(禪敎釋)』, 『선교결(禪敎訣)』, 『설선의(說禪儀)』, 『회심곡(回心曲)』 등이 있다. 휴정의 입적 후 그의 문도 가운데 편양파(鞭羊派)에서 제시한 ‘태고임제법통설(太古臨濟法統說)’이 교단의 지지를 받으며 계승되어 오늘날 대한불교 조계종의 공식 법통으로 자리잡았다. 휴정은 1604년(선조 37) 1월 23일 나이 85세, 법랍 67세로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입적하였다.
[상훈과 추모]
선조는 휴정과 그의 제자들이 전쟁 중에 근왕을 위해 승군을 일으킨 충의의 공적을 인정하여 휴정에게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의 직함을 내렸으나 휴정은 이를 유정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들어갔다. 이에 선조는 다시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존칭과 함께 정2품 당상관의 품계를 내려 그 공을 치하하였다.
휴정이 입적하자 제자들은 묘향산 안심사(安心寺),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부도를 세웠고, 17세기 중반 휴정의 의발이 대둔사에 전해지면서 대둔사에도 휴정의 부도와 비석이 조성되었다. 또한 임진왜란 때의 의병 활동은 조선 후기 높게 평가받아 1738년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1789년 해남 대둔사(大芚寺), 1794년 묘향산 수충사(酬忠祠)가 사액되고 공식 향사가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