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5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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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憲球 |
이칭/별칭 | 치서(稚瑞),국간(菊幹),충간(忠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상배 |
출생 시기/일시 | 1784년 - 이헌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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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16년 - 이헌구 식년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829년 - 이헌구 통정대부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36년 - 이헌구 이조참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41년 - 이헌구 한성판윤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41년 - 이헌구 공조판서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42년 - 이헌구 형조판서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42년 - 이헌구 예조판서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44년 - 이헌구 대사헌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44년 - 이헌구 덕원부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845년 - 이헌구 해배 |
활동 시기/일시 | 1845년 - 이헌구 사은 겸 동지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52년 - 이헌구 우의정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52년 - 이헌구 좌의정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855년 - 이헌구 광주부 유수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858년 - 이헌구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65년 - 철종의 묘정에 배향 |
거주|이주지 | 이헌구 거주 - 서울특별시 |
유배|이배지 | 이헌구 유배지 - 덕원부 |
사당|배향지 | 이헌구 배향지 - 철종 묘정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전주(全州) |
대표 관직 | 통정대부|이조참판|한성판윤|공조판서|형조판서|예조판서|대사헌|사은 겸 동지사|우의정|좌의정|광주부 유수 |
[정의]
1855년 서울특별시 강남구 지역을 포함한 경기도 광주 일대를 관할했던 광주유수를 지낸 문신.
[개설]
조선 후기 순조·헌종·철종 3대의 문신을 지내며, 내치에 공을 세운 인물로 정승의 반열에 올랐으며, 말년에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대를 다스리는 광주부 유수로 임명되어 광주 일대의 행정을 담당하였다.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치서(稚瑞), 호는 국간(菊幹)이다.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의 현손이며 통훈대부(通訓大夫) 황주진관병마절제도위(黃州鎭管兵馬節制都尉) 이장현(李章顯)의 아들이다. 1784년(정조 8)에 출생하여 1858년(철종 9)에 사망하였고, 생활이 청렴하며 근면하기로 이름났다.
[활동 사항]
1816년 식년문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여 1829년 통정대부가 되었고 이후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냈다. 1836년에 이조참판(吏曹參判), 1841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공조판서·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1842년 형조·예조판서 등을 지내는 등 정부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844년에 대사헌으로 김유근(金逌根)·김홍근(金弘根)의 추죄를 주장하다가 덕원부에 유배되었다. 다음해 해배되어 사은 겸 동지사가 되었으며 1852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외직으로는 1837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흉년으로 인한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폈으며, 1842년에는 평안도관찰사로 파견되어 변방의 군량미와 군사들의 훈련 상태를 점검하고 돌아왔다. 좌의정에서 물러난 직후에는 쉬기를 원하였으나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와 1855년 광주부 유수에 임명되어 고령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을 돌보았다.
1858년 이헌구의 회혼을 맞아 철종이 세 임금을 모신 신하로 궤장(几杖)을 하사하라는 명을 내렸으며,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그해 죽었는데 실록에 기록된 이헌구의 졸기에는 “나라와 백성의 치란(治亂)에 이르러 이를 돌보아 연연하는 마음이 가슴에 서려 있어 왕왕 눈물을 흘릴 때가 있었다. 그의 충성과 근면함, 넉넉하고 후한 마음이 그지없고 성실하여 세상 사람들이 지금까지 칭송(稱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