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5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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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觀柱 |
이칭/별칭 | 경일(景日),문익(文翼)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상배 |
[정의]
조선 후기 서울특별시 강남구 지역을 포함한 경기도 광주일대를 관할하는 광주유수를 지낸 문신.
[가계]
김관주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일(景日)이다. 아버지는 영조의 장인인 김한구(金漢耉)의 사촌동생 김한록(金漢祿)이다. 어머니는 서옥업(徐玉業)의 딸이며, 부인은 유간(兪墾)의 딸이다. 1743년(영조 19)에 출생하여 1806년(순조 6)에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1765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교리(校理) 등 언관직을 지냈다. 1772년 홍봉한(洪鳳漢)의 척신정치(戚臣政治)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었으며 이른바 시파(時派)와 벽파(辟派)의 논쟁에 불을 붙였다. 이로 인해 정조 때도 중용되지 못하다가 1793년 교리를 임명했으나 관직에 나오지 않자 용궁현감에 임명하였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한 후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이 시작되면서 그의 관직 생활도 꽃을 피게 되었다. 당시 영의정 심환지(沈煥之)의 건의에 따라 1801년 종2품으로 특별 임용되어 비변사(備邊司) 제조에 발탁되었고, 그해 승지(承旨)·이조판서(吏曹判書)·병조판서(兵曹判書)·형조판서(刑曹判書)·예조판서(禮曹判書)에 연이어 임명되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1802년에는 광주유수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1804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재시도를 반대하였다가 미움을 사 우의정에서 파직되고, 곧이어 판중추부사로 서용되었으나 실권이 없는 직이었다. 이후 1806년 대사헌 신헌조(申獻朝)의 탄핵을 받아 함경도 경흥으로 유배 가는 도중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864년(고종 1) 관작이 회복되었고, 1910년 문익(文翼)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