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5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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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云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상배 |
[정의]
고려 후기에 사평원[오늘날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대]을 중수했던 문신.
[가계]
본관은 풍양(豊壤)이며, 평장사 조맹(趙孟)의 31대손이다. 이인복(李仁復)의 문인이다. 1332년(충숙왕 복위 1)에 출생하여 1404년(태종 4)에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1357년(공민왕 6)에 문과에 급제하여 안동서기(安東書記)로 출사하였다. 홍건적의 침입 때 왕을 호종한 공로로 1363년 2등 공신이 되었으며, 1364년에 국자감 직강이 되었고, 이어 삼도안렴사를 지내고, 1374년에 전법총랑 등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상주 노음산에 은거하였다. 1377년 다시 등용되어 좌간의대부, 판전교시사를 지내다가 1380년 다시 사임하고 경기도 광주(廣州) 고원강촌(古垣江村)에 거처하면서 판교원(板橋院)과 사평원(沙平院)을 중수할 때 스스로 원주(院主)라고 일컬으면서 떨어진 옷과 짚신으로 역부들과 함께 일하였다. 1388년 다시 관직에 나와 전리판서를 지내다가 1392년 조선이 개국하고 강릉부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병을 칭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광주에서 여생을 보냈다. 고려 말 조선 초의 전환기 시대에 고민했던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석간집(石磵集)』이 있다고 하나 남아 있지 않다. 편저로는 최해(崔瀣)의 『동인지문(東人之文)』에서 「오칠(五七)」을 본떠 만든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이 전한다. 이 외에는 5수의 칠언절구가 『동문선』에 실려있다.
[묘소]
『고려사』에는 그의 묘가 구리 아차산 남쪽 기슭에 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