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4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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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華陽面松金里萬歲運動 |
이칭/별칭 | 성현 일본인 구타 시위 사건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19년 4월 3일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면 송금리에서 만세 운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일본인 구타 사건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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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 시기/일시 | 1919년 4월 3일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면 송금리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운동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9년 4월 3일 - 군중들이 일본인 잡화상을 점거하고, 경찰과 재향 군인들을 상대로 항쟁하며 만세 시위운동 전개 |
발생|시작 장소 | 성현 일본인 구타 시위 사건 발생지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면 송금리 |
성격 | 독립운동|항일 운동 |
관련 인물/단체 | 정두석|이도지|이송아|박봉현|이돌수|양순오|이유근|김정수|홍원표|정명근|서돌명|정한도|정경원|양쇠덕|서복술|김남극 |
[정의]
1919년 4월 3일에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면 송금리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운동.
[개설]
3·1 운동 당시 청도군에서는 3월 중순부터 5월 초순에 걸쳐 모두 7회의 크고 작은 만세 시위운동이 발생하였다. 특히 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시위 참가자들은 관공서 습격, 일본 경찰 구타, 일본인과의 충돌, 자위회 공격 등을 하였고, 점차 격렬한 무력시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1919년 4월 3일 청도군 화양면 송금리에서 만세 운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일본인을 구타하고, 일제 경찰과 충돌하는 일이 발생했다.
[역사적 배경]
1919년 3월 1일 만세 시위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청도군 지역은 일찍이 일제의 근대적 민족의식을 갖춘 청년 지식인들이 독자적으로 만세 시위를 계획하거나 주도하였고, 나아가 농민 및 노동자 계층이 참여함으로써 대중적인 시위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경과]
1919년 4월 3일 정두석(鄭斗石), 이도지(李道支), 이송아(李松芽), 박봉현(朴鳳鉉), 이돌수(李乭守), 양순오(楊順五), 이유근(李有斤), 김정수(金廷秀), 홍원표(洪元杓), 정명근(鄭命根), 서돌명(徐乭命), 정한도(鄭汗度), 정경원(鄭璟洹), 양쇠덕(楊釗德), 서복술(徐卜述), 김남극(金南極) 등이 청도군 화양면 송금리 선왕당산(仙王堂山)에 올라 ‘독립 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 일본인 잡화상과 거류민들이 경찰과 재향 군인들을 앞세워 시위를 저지하려 하였다. 이에 분노한 군중들은 잡화상을 점거하는 한편, 경찰과 재향 군인들을 상대로 항쟁하며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결과]
당시 선두에서 시위하던 16명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압송되었으며, 정두석, 이도지 등은 두 차례나 탈출을 감행하였다. 1919년 6월 26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이송아가 징역 1년을 판결 받고, 박봉현, 김남극, 이돌수, 양순오, 이유근, 김정수, 홍원표, 정명근, 서돌명, 정한도, 정경원, 양쇠덕, 서복술 등은 각 징역 6월의 판결을 받았다.
[의의와 평가]
청도군 화양면 송금리의 만세 운동은 운문면의 일경 구타 의거와 유호리 일본인 구타 의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만세 시위에서 일본 군경이나 일본인과의 충돌로 발전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