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15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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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映畵 |
영어의미역 | Movie |
이칭/별칭 | Film, Cinema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종갑 |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에서 연속 촬영한 필름을 연속으로 스크린에 비추어 물건의 모습이나 움직임을 실제와 같이 재현하여 보이는 영상.
[개설]
2010년 7월 1일 마산, 창원, 진해의 통합 창원시 출범에 따라 영화의 역사를 3개시 통합하여 개괄한다.
영화의 광범위한 보급은 전기의 공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초기에는 발전기 등을 이용하여 영사기를 가동했겠지만 대형 스크린에서 장편의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전기 공급이 필수적이다. 마산에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온 것은 1911년 5월이었다.
마산에서 연대가 확인된 최초의 영화 상영은 1913년 일본 실업인 하사마 후사타로[迫間房 太郞]의 창고 앞에서 상영된 신바카야로다이쇼[新馬鹿大將]와 대정천황 등극실사(大正天皇 登極實寫)였다.
마산 최초의 극장은 1907년부터 1934년까지 존재했던 환서좌(丸西座)로 가부키좌[歌舞技座]를 본뜬 목조 2층 건물로 500~6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고 한다. 마산에는 3개의 극장이 있었는데, 환서좌, 수좌, 마산좌가 그것이었다. 또한 진해에도 1942년경 진해읍 국천정(菊川町) 24번지에 묘락좌(妙樂座)가 있었다.
[전개]
창원시 최초의 극장은 마산의 1907년부터 1934년까지 존재했던 환서좌(丸西座)로 『경상남도 안내』[경상남도청, 1914년]에서 당시 마산에 2개의 극장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두 극장이 바로 신마산 야나기마치[柳町][현 신창동]의 환서좌와 미야고마치[都町][현 중앙동]의 도좌(都座)였다.
뒤이어 『삼천리』 잡지 1934년 11월 1일자에 실린 ‘삼천리기밀실(三千里機密室)’이라는 기사가 발굴되었는데, 이 기사에는 전국의 극장 목록이 실렸고, 그 속에 마산 환서좌의 이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로써 최소한 1914년에서 1934년 사이에 극장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마산 환서좌는 1907년 봄 건설되어 1934년경까지 존재했으며, 회전 무대를 갖추고 관객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가부키 극장이었다. 위치는 현재 신마산 신창동 지역에 있었으며, 경영자는 일본인 나카무라 쵸우로 가부키를 비롯한 일본 전통물을 중심으로 월 12회 공연했고 관객 역시 일본인이었다.
환서좌 이후에 등장한 마산의 두 번째 극장은 구마산 수정((壽町)[현 수성동]에 설립된 수좌(壽座)였다. 『마산 야화』에 구마산 지역에 극장이 처음 생긴 것은 1917년 경 건설된 수정의 수좌이며 조선인들이 많이 드나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활동사진 필름 검열 개요』[조선 총독부 경무국, 1931]에 따르면 수좌의 관객 정원은 정확히 377명이며, 극장주는 사쿠라바 미키오[櫻庭幹雄]이었다.
일제 강점기 시대 조선 총독부는 민심 수습 차원에서 의료 계몽이나 저축 계몽 같은 여러 가지 기록 영화를 제작하여 상영하였다. 1921년 6월 21일자 『동아 일보』에는 마산에서도 이런 영화를 상영한 기록이 있다. 마산 수좌에서 경상남도 제3부 주최로 8월 16일 8시, 마산 부윤(馬山府尹) 다카츠 도모모치[高律友保]와 경찰 서장 가토[加藤]가 참석한 가운데 호열자[콜레라] 예방에 관한 영화를 상영하였다고 한다. 또한 1923년 11월 20일, 『동아 일보』 기사에는 ‘경성 동아 문화 협회 활동 사진대’가 지난 13일 오후 7시부터 수좌에서 「춘향전」 전 9권을 지방 관객들의 환영 하에 4일간 연속 상영하였다고 한다.
1928년 10월 19일 수좌에서 조선 일보사가 마산 지역 독자들을 위하여 「지나가(支那街)의 비밀」을 상영하였으며, 11월 30일은 알렉산더 수의 작품인 「동큐」, 12월 1일은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주연의 「다그라스 대왕」을 상영하였다. 그 외 1929년 9월 28일부터 29일까지 중외 일보 확장 기념 영화 상영, 1930년 2월 9일부터 10일까지 마산 상공 협회 점원 위안 영화 대회, 1930년 5월 17일부터 18일까지 마산 신용 상점 고객 대상 영화회, 1930년 11월 6일부터 8일까지 마산 실업 축구단 주최 시민 위안 영화 상영회, 1932년 3월 8일 『조선 일보』 독자 우대 상영회 등 1932년 9월까지 주옥같은 명화를 상영하였다.
마산에는 또한 도좌(都座)라는 극장이 있었다. 「경상남도 안내」[1914]에 실린 마산에는 환서좌와 도좌라는 2개의 극장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도좌는 미야고마치[都座] 1정목[현 중앙동 1가]에 있는 소규모 극장이었다. 수용 인원이 300명 정도로 작았는데, 1926년 9월에 혼다 쓰찌고로우[本田槌五郞]가 이 극장을 인수하여 개보수하여 45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도록 확장하면서 마산좌(馬山座)로 개명하였다.
도좌에서는 『매일 신보』 독자 위안을 위한 ‘전조선 순회 활동사진’ 상영으로 1922년 4월 16일 동경에서 막 개봉된 「평화 박람회의 실황」과 총독부 추천 영화인 「애(愛)의 극(極)」, 이외에 수편의 작품이 함께 상영되었다.
마산시 두월동 3가 3번지에 있었던 제일 극장은 일제 강점기 앵관(櫻館)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1933년 5월 17일자 『동아 일보』에 ‘마산 앵관 제막식’이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 기사에 의하면 앵관은 마산 연예 주식회사에서 1932년 11월부터 경정 삼정목(京町 三町目)[현 두월동]에서 신축을 시작하였다. 그 건물이 완성되어 1933년 5월 13일부터 3일간 동경에서 온 카타오카 도주로[片岡當一郞] 일행을 초빙하여 제막식을 거행한다는 것이다.
『마산 야화』에 의하면 앵관은 2층 건물이었는데, 1층은 일본식 다다미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창간 15주년을 맞은 『동아 일보』는 전국에서 지역별로 각기 다른 기념행사를 열었는데, 1935년 4월 1일 동아 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마산 독자 위안 영화회가 앵관에서 개최되었다.
앵관에 관한 기사는 1939년 9월 30일 『조선 시보』에 실린 일본 쇼치쿠[松竹] 영화사 제작의 영화를 상영한다는 예고를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근대 마산 시민들의 토론장이었던 마산 민의소(馬山民義所)는 시민 극장의 모태로, 민의소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 후 마산 구락부가 이를 이어 받아 역시 토론과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였다. 구락부는 일본인 건축가에게 매각되어 공락관이라는 극장으로 변모하게 되고 이 극장이 광복 후 시민 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어 운영을 계속하게 된다.
일제 강점기 시대 마산 시민의 대의 기관인 마산 민의소가 1908년 석정(石町)[현 창동]에 건립되었고 그 건물의 이름을 공회당이라고 했다. 공회당이 마산 구락부 회관으로 바뀌게 된 경위는 분명하지 않다. 마산 구락부는 1920년 6월 12일 오후 1시 100여명의 인사가 모인 가운데 성대하게 발기 총회를 가졌다. 『동아 일보』의 1922년 6월 14일자 기록에 의하면 1922년 6월 8일 마산 경찰서 주최의 위생 선전 활동영화를 마산 구락부 회관 광장에서 영화 상영을 했다고 한다.
마산 구락부 회관은 1936년 마산 부의원이며 마산 극장을 경영하던 혼다 쓰찌코로우[本田槌五郞]에게 매각되어 공락관(共樂館)이라는 극장으로 신축되었다. 『동아 일보』 1935년 8월 19일자에 따르면, 혼다가 제출한 극장 신축 허가가 나서 극장을 건설하게 되었는데, 장소는 석정(石町) 64번지 ‘전 마산 구락부 폐터’였다. 건평이 120평에 2층으로 신축되었고 화재에 대비하여 콘크리트로 건설하였다. 공사는 8월 20일 착수하여 11월 하순 경에 준공되었다고 한다.
『조선 중앙 일보』 1936년 6월 11일자에 공락관에서 6월 15일, 16일 양일간 미국 영화 「킹 오브 킹」을 상영한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공락관은 광복 후 시민 극장으로 개명하고 계속 영화를 상영하였다. 1949년 1월부터 5월 사이에 시민 극장에서 상영된 영화의 광고는 모두 5편이 남아 있다. 1월 15일부터 이규환 감독의 「해연」이 상영되었다. 이 영화는 마산 출신 정진업이 시나리오를 쓰고, 마산 출신인 이철혁이 제작을 맡았다. 4월 9일부터 10일까지 이틀간 프랑스 영화 「파리의 지붕 밑」이 상영되었으며, 4월 19일부터 20일까지 이틀간 무성 영화 「검사와 여선생」이 상영되었다. 또한 4월 21일, 22일 양일간 「스파이 전」과 「파리의 총아」가 상영되었고, 5월 1일에는 미국 영화 「소년의 거리 속편」이 상영되었다.
광복 후 마산에는 수십 개의 극장이 생겨났다가 없어졌다. 광복 직후에는 일제 강점기 시대 때 운영되던 앵관이 제일 극장으로, 공락관이 시민 극장으로 개명하여 운영되었고 마산 극장은 이름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영업을 재개하였다. 그러다가 1947년 부림 극장을 시작으로 새로운 극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전쟁 중이었던 1951년, 창원군 상남면에 미국 공보원 내에 상남 영화 촬영소가 설치되어 리버티 뉴스를 비롯한 각종 뉴스물을 제작하여 해외에 전쟁 소식을 전했다. 상남 촬영소는 당시 ‘작은 할리우드’라고 불릴 정도로 최상의 장비들을 구비하고 있었으며, 전후에도 없어지지 않고 60년대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영화인]
여배우 고선애(高善愛)는 1911년 마산 출신으로 1955년 김기영 감독의 「양산도」로 데뷔하여 「자유부인」, 「마의 계단」 등 백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정진업(鄭鎭業)은 1916년 김해시 진영읍에서 태어났으며, 1934년 마산 상업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마산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희곡 작가, 영화배우로 지역 문예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는 50년대 후반을 전후해서 영화 「해연」, 「여인애사」, 「삼천만의 꽃다발」에 출연하였고 각본을 쓰기도 하였다.
영화배우 최현(崔賢)은 부산 출신으로 1946년 마산으로 이주하여 1953년 마산 상업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영화 데뷔는 1951년 작 「삼천만의 꽃다발」이다. 「삼천만의 꽃다발」은 6·25전쟁으로 마산으로 피난 왔던 청구 영화사가 마산의 영화 동호인들과 뜻을 모아 제작한 영화로 신경균이 감독한 흑백 필름이다. 그 외에도 「춘향전」, 「불멸의 성좌」에서 주연을 맡았다.
영화배우 이수련(李秀鍊)은 1935년 마산 출생으로 1959년 최은희와 공연한 「가난한 애인들」로 데뷔하였다.
영화배우 이대엽(李大澲)은 마산 출신으로 1958년 한형모 감독의 「나혼자 만이」로 데뷔하였으며, 「3등 호텔」, 「흰구름 가는 길」, 「젊은 표정」, 「철조망」, 「돌아오지 않는 해병」 등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영화배우 이성섭(李晟燮)은 1937년 마산 동성동에서 태어나 1961년 신상옥 신필름의 「상록수」로 데뷔하여 「연산군」, 「가족회의」, 「아버지 결혼하세요」, 「빨간 마후라」 등에 출연하였다.
영화배우 김혜정(金惠貞)은 마산 창동 출신으로 1958년 이만홍 감독의 「봄이 다시 오려나」로 데뷔했다. 「아카시아 꽃잎 필 때」, 「북극성」, 「나도 인간이 되련다」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영화 제작자 이철혁(李喆爀)은 마산 출신으로 1947년 이규환 감독, 조미령 주연으로 「해연」을 제작하였다. 그 후 「춘향전」, 「왕자 호동과 낙랑 공주」, 「아리랑」을 제작하였다.
영화 감독 김사겸(金仕謙)은 마산 중성동 출신으로 마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69년 「그대 가슴에 다시 한 번」으로 데뷔하였다. 1975년에는 「창수의 전성시대」를 감독하였다.
영화감독 김성홍(金成鴻)은 1956년 창원 북면에서 출생하였고 마산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달콤한 신부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의 시나리오 작가로 출발하여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로 감독 데뷔를 하였다.
강제규(姜帝圭) 감독은 1962년 마산 교방동에서 출생하였다. 1991년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로 본격적인 시나리오 작가로 데뷔하여, 1996년 「은행나무 침대」로 감독 데뷔를 하였다.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 등의 흥행작이 있다.
[극장의 변천]
1914년 도좌로 개관된 후 마산좌(馬山座)로 개명하여 그 역사를 이어 온 마산 극장은 광복 후에도 마산시 중앙동 1가에 마산 극장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아 운영을 하다가 1980년 이후 폐관되었다.
일제 강점기 마산 시민의 대의기관인 마산 민의소(馬山民義所)가 1908년 석정(石町)[현 창동]에 건립되었고 그 건물의 이름을 공회당이라고 했다. 공회당이 마산 구락부 회관으로 바뀌게 된다. 마산 구락부 회관은 1936년 마산부 의원이며 마산극장을 경영하던 혼다 쓰찌코로우[本田槌五郞]에게 매각되어 공락관(共樂館)이라는 극장으로 신축되었다. 공락관은 광복 후 시민 극장으로 개명하여 계속 영화를 상영하였다. 1993년에는 최신 영국제 CP65 돌비 시스템을 설치하였으나 관객을 모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시민 극장은 1995년 7월 27일, 「브레이브 하트」 상영을 마지막으로 기나긴 역사의 문을 닫았다.
마산시 두월동 3가 3번지에 있었던 제일 극장은 일제시대 앵관(櫻館)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제일 극장은 좌석 613석, 입석 335석으로 총 948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폐관 일시는 정확히 알 수 없는데, 『극장 연감』을 보면 1965년판에는 기록이 있고 1977년에는 삭제되어 있으므로 이 기간 중에 폐업된 것으로 보인다.
1947년 8월 1일 마산시 부림동 83번지에 개관한 부림 극장은 좌석 852석, 입석 530석으로 총 1,282명 수용이 가능했다. 부림 극장은 국제 극장으로 개명한 후 1956년 초 강남 극장으로 바뀌었다. 2000년에 강남 극장은 기존의 1, 2층을 분리시켜 1관, 2관으로 수리하고 재개관한 후 2004년 8월 말 「바람의 파이터」 상영을 마지막으로 폐관되었다.
마산시 추산동 19번지에 있던 자유 극장은 1958년경 주류 창고를 개조하여 만든 재개봉관이었다. 자유 극장이 중앙 극장으로 개명된 것은 1961년 7월이었다. 1999년 6월에는 연흥 극장에서 임대하여 연흥 5관으로 극장 이름이 바뀌었으나 얼마가지 않았고 곧 중앙 극장으로 원상 복귀하였다. 그 후 관객의 감소로 인하여 고전하다가 2003년 12월 31일 「반지의 제왕 3편」의 상영을 끝으로 폐관하였다.
1958년 1월 23일 동보 극장이 마산시 오동동 18-1번지에 개관하여 1970년 이후 폐관되었다. 1990년 5월 12일 똑같은 자리에 스카라 극장이 개관하여 대한 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관객의 외면으로 문을 닫았다.
마산시 서성동 83-34번지에 3·15 기념관으로 개관한 3·15회관은 1963년 4월 24일부터 영화 전용 상영관으로 개칭하였다. 개관 초기에는 외국 영화 전문 상영관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외국 영화를 중심으로 인기 있는 작품을 잘 선정하여 관객들이 많았으나 1995년 「벤허」 재수입 상영 후 폐관되었다.
1970년 7월 20일 마산시 상남동 101번지에 자리 잡았던 980석의 태양 극장은 「두 여인의 집」을 개관 프로로 시작해서 1989년 9월 24일 홍콩 영화 「영환소저」, 「비룡문」의 2본 동시 상영을 끝으로 헐리고 말았다. 1989년 문을 닫은 태양 극장은 1991년 5월 18일 신태양 시네마 볼링 센터라는 이름으로 신축 개관하였으나, 1999년 「브로크다운 팰리스」를 끝으로 문을 닫았다.
진해에는 진해시 여좌동 761번지에 720명 정원의 진해 극장, 경화동 11번지에 827명 정원의 경화 극장, 화전동 48번지에 520명 정원의 해양 극장, 화천동 20번지에 376명 정원의 중앙 극장이 있었다.
창원에는 창원면 북동리에 200석 규모의 창원 극장, 용호동 73-16번지에 332석 규모의 정우 극장, 중앙동 96-1번지에 279석 규모의 창원 시네마, 중앙동 95-3번지에 260석 규모의 서진 극장, 소답동 271-9번지에 163석 규모의 한성 극장, 북면 신촌리 1346-12번지에 북면 자동차 극장인 씨네포유가 있었다.
[현황]
이와 같이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200석 정도 규모의 소극장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기존의 대극장이 여전히 운영되던 시기였지만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한 소극장은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었고 소극장의 과당 난립이 시작되었다.
소극장의 등장은 컬러 TV의 보급과 비디오의 확산으로 인한 영화 산업의 재편과 깊은 관련이 있다. 1980년 처음으로 국내에 컬러 TV가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비디오테이프라는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면서 집안에서도 편안하게 영화를 즐길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자 기존의 영화관은 인기를 잃어갔다. 많은 극장들이 영업 손실을 입었고 객석 수가 많은 대형 영화관일수록 그 피해가 컸다.
이 때 작은 규모의 극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이전의 대형 극장들과는 모습이 많이 달랐다. 우선 이전의 극장은 큰 독립 건물을 세워서 운영했는데 소극장들은 작은 건물을 하나 짓거나 기존의 빌딩을 대여하여 사용했다. 객석이 적기 때문에 1~2개 층 정도를 빌려 수리를 하면 바로 극장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마산에는 1983년 3월 5일 양덕동에 한일 극장이 생긴 것을 시작으로 1984년 2월 28일 동성동에 명보 극장, 1984년 4월 29일 동성동에 아세아 극장, 1984년 11월 17일 양덕동에 아카데미 극장, 1988년 7월 15일 합성동에 동보 극장, 1988년 7월 23일 중성동에 동곡 극장, 1988년 11월 12일 합성1동에 경동 극장, 1989년 4월 22일 부림동에 피카디리 극장, 1990년 3월 3일 동성동에 동아 극장, 1990년 3월 10일 합성동에 제네바 극장, 1990년 6월 16일 석전동에 은하 극장, 1990년 9월 8일 해운동에 남마산 극장과 남부 극장, 1991년 8월 7일 합성동에 태화 극장 1관, 1996년 6월 29일 합성동에 태화 극장 2관, 양덕동에 코리아 극장, 부림동에 대명 극장과 보림 극장 등이 줄을 이어 생겨났다.
1980년대를 휩쓴 소극장의 열풍은 1990년 6월 16일 지하 1층 지상 2층의 기존 극장보다 깨끗한 시설과 다양한 상영 프로그램으로 최고의 흥행작만 골라서 상영하는 배급망을 가진 연흥 극장의 개관으로 기존의 극장과 신흥 소극장들이 모두 문을 닫아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10년 남짓, 1999년 복합 상영관 멀티플렉스의 등장으로 지금의 마산, 창원, 진해의 극장가는 예전의 모습을 찾기 힘들 정도로 변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