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억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649
한자 金億述
영어공식명칭 Gim Eoksul
이칭/별칭 여안(汝安),척재(拓齋)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류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9년연표보기 - 김억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0년대 초 - 김억술 전우의 문하에서 수학
활동 시기/일시 1924년 - 김억술 이거
몰년 시기/일시 1959년연표보기 - 김억술 사망
출생지 김억술 출생지 -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창동리
거주|이주지 김억술 이거지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지도보기
수학|강학지 김억술 수학지 -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면 계화리지도보기
성격 학자
성별
본관 부안(扶安)

[정의]

일제 강점기 부안에서 활동한 한학자.

[개설]

근대의 격변기에 살았던 김억술은 20대 초반에 계화도[현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면 계화리]로 간재(艮齋) 전우(田愚)를 찾아가 수학하였으며, 1922년에 전우가 사망하였을 때에는 “우리 사문(斯文)이 장차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라고 반문하며 통곡했던 전우의 열렬한 마지막 문도(門徒)였다.

[가계]

김억술(金億述)[1899~1959]의 본관은 부안(扶安)이며, 자는 여안(汝安), 호는 척재(拓齋)이다. 문정공 김구(金坵)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벽봉(碧峰) 김낙진(金洛進)이다. 큰형은 간재의 고제(高弟)[학식과 품행이 뛰어난 제자]인 후창(後滄) 김택술(金澤述)이다.

[활동 사항]

김억술은 1899년 전라북도 고부군 이평면 창동[현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창동리]에서 태어났다. 1924년에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로 이사하였으며, 말년에는 선영이 있는 분토동 모산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김억술은 스승 간재 만큼이나 배일사상이 철저하였다. 일본식 성명 강요[창씨개명]와 호적 작성을 거부하였으며, 왜놈들이 보기 싫어 읍내도 출입하지 않고 향교도 발길을 끊었다. 일본인들이 주는 모든 배급품을 거부하였고, 할머니에게 내린 은사금과 은배(銀杯)도 거부하여 고부헌병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1924년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간재 전우의 문집을 출간하는 문제를 놓고 문도들이 격론을 벌일 때, 김억술은 “중립론을 규탄한다”는 글을 지어 시류에 영합하는 태도를 분연히 거부하였다. 전우가 세상을 떠난 후, 그를 기리는 계양사(繼陽祠) 건립에 힘썼고, 사우를 관리, 중수하는 책임을 맡아 일을 처리하다 1959년 과로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김억술은 김홍재(金弘梓), 김현술(金賢述)과 함께 ‘부안 김씨 3현(三賢)’, ‘부안 김씨 3걸(三傑)’ 또는 ‘부안 간재 문하(艮門)의 마지막 삼문장(三文章)’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문장가였다. 특히 시대를 한탄하는 내용의 유려한 시문들을 많이 남겼다. 저술로 『척재문집(拓齋文集)』[6권]이 전하는데, 1999년에 허호구(許鎬九)가 역주본을 출간하였다. 본문은 시(詩)·서(書)·잡저(雜著)·부록(附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오언 절구, 칠언 절구와 율시들이 많은데, 생도들과 조카, 벗들에게 보낸 시들로, 당시 김억술 자신이 처한 형편과 감회를 읊은 것들이다. 서에는 맏형인 김택술에게 보낸 편지가 29점이나 되는데, 김억술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간재의 고제이기도 한 큰형 김택술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잡저는 일기와 중립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기는 1916년부터 1918년까지와 1921년부터 1922년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어서 김억술의 면모를 살피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중립론은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간재의 문집을 출간하는 데 대하여 단연코 거부하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글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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