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6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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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銘 |
영어공식명칭 | Gim Myeong |
이칭/별칭 | 여신(汝新),화곡(火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장순순 |
출생 시기/일시 | 1545년 - 김명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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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05년 - 김명 생원시 합격 |
몰년 시기/일시 | 1619년 - 김명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68년 - 김명 유천서원 배향 |
출생지 | 김명 출생지 - 전라북도 부안군 |
거주|이주지 | 김명 이주지 - 전라남도 장성군 북일면 문암리 |
사당|배향지 | 유천서원 -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영전길 89-38[영전리 212-3]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부안(扶安) |
[정의]
조선 전기 부안 출신의 학자.
[가계]
김명(金銘)[1545~1619]의 본관은 부안(扶安)이며, 자는 여신(汝新), 호는 화곡(火谷)이다. 문정공(文貞公) 김구(金坵)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주부(主簿) 김경정(金景貞)이다. 죽계(竹溪) 김횡(金鈜)[1541~1590]이 그의 형이다.
[활동 사항]
김명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형인 죽계 김횡과 함께 학문에 힘썼다. 이에 김명의 학명(學名)이 널리 알려져 경향 각지의 석학들과 교유하게 되었다. 그중 친교가 깊었던 인물로는 월사 이정구(李廷龜)와 율곡 이이(李珥)를 들 수 있다. 월사 이정구는 김명의 학문을 아끼어 벼슬길에 나오기를 청하였으나 김명은 끝내 벼슬은 하지 않았다. 61세 되던 1605년(선조 38)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만년에 전라남도 장성군 개암[현 전라남도 장성군 북일면 문암리 제암마을의 옛 이름]으로 옮겨 살았는데, 그곳에서 후진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근처에 살던 현주(玄洲) 조찬한(趙讚韓)과는 서로 학문을 교류하였으며, 마음을 터놓고 시국을 논하기도 하였다. 문장이 제일이었던 김명은 1600년(선조 33)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부안향교와 부안 객사인 부풍관(扶風館)을 중건할 때 신축 상량문을 지어 그 글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학문과 저술]
김명의 문집인 『화곡선생유고(火谷先生遺稿)』는 1915년에 간행되었다. 서문은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지었고 발문은 후손인 김병술(金炳述)과 김수철(金水喆)이 지었다. 2권 1책으로 시(詩), 서(書)의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768년(영조 44)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영전길 89-38[영전리 212-3]에 있는 유천서원(柳川書院)에 배향되었다. 1893년(고종 30) 후손들이 전라남도 장성군 북일면 문암리 제암마을에 화곡 김선생 유허비(火谷金先生遺墟碑)를 세웠으며, 비문은 기우만이 지었다. 1937년 화곡 김선생 유허비로부터 50m거리에 새로 비와 비각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