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5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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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州崔氏 |
영어공식명칭 | Jeonju Choessi|Jeonju Choe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원철 |
[정의]
최아를 시조로 하고, 최생명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부안군의 세거 성씨.
[연원]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시조를 달리하는 세 유파가 있다. 예부시랑(禮部侍郞) 최균(崔均)을 시조로 하는 사도공파(司徒公派), 삼중대광(三重大匡) 최군옥(崔群玉)을 시조로 하는 문충공파(文忠公派), 그리고 평장사(平章事) 최아(崔阿)를 시조로 하는 문성공파(文成公派)이다. 부안군에 세거하는 전주 최씨는 대부분 문성공파이다. 최아는 당나라에서 건너와 전주에서 살았는데,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완산군(完山君)에 봉군되었고 전주를 관향으로 삼았다.
최아는 경상도 안렴사 최용생(崔龍生), 대호군(大護軍) 최용각(崔龍角), 판사(判事) 최용갑(崔龍甲), 중랑장(中郎將) 최용봉(崔龍鳳) 네 아들을 두었다. 최용봉의 손자 월당(月塘) 최담(崔湛)이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을 지냈으며 최광지(崔匡之), 최득지(崔得之), 최직지(崔直之), 최덕지(崔德之) 네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뛰어났다고 하여 세상에서는 이들을 사지(四之)라고 하였다. 큰아들 최광지는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조선 세종(世宗) 때 집현전 제학을 지냈다.
[입향 경위]
최광지의 아들 옹암(瓮菴) 최생명(崔生明)은 경시전직(京市殿直)이었는데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조카 단종(端宗)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고 벼슬을 내놓고 처가가 있는 부안 옹정(瓮井)[현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으로 은거하며 전주 최씨 부안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옹정의 부안 김씨(扶安金氏) 군사공(郡事公) 김광서(金光敍)가 처조부이다.
또 최용각(崔龍角)의 후손 최규현(崔圭賢)이 전라북도 김제 만경에서 부안읍 동중리에 들어와 살았다. 상서면 용서리 용동마을에는 최득지(崔得之)의 자손 최병선(崔秉銑)이 전라북도 고부(古阜)에서 들어와 세거하였고, 주산면 갈촌리 신기마을에는 소윤공파 최득지(崔得之)의 자손 최규천이 고부에서 들어와 살았다. 역시 소윤공파인 최규정(崔圭禎)이 고부에서 들어와 보안면 하입석리에 자리를 잡았다.
변산면 운산리에는 대호군파 최용각(崔龍角)의 후손 최용섭(崔瑢燮)이 전라북도 정읍에서 들어와 살았다. 줄포면 줄포리와 동진면 장등리에는 연촌(煙村) 최덕지의 후손이 전라북도 전주에서 들어와 살았다. 보안면 덕산리[보안면 상입석리]에는 광양군파 후손 최광석(崔光碩)이 전라북도 고창에서 들어왔으며, 문충공파 만육당(晩六堂) 최양(崔瀁)의 자손도 부안 관내에 산재하여 살고 있다.
[인물]
전주 최씨는 옹정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최생명의 아들 고궁당(固窮堂) 최수손(崔秀孫)은 진사였으나 벼슬길을 접고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아들 다섯을 두었다. 그중 최순성(崔順成)과 최극성(崔克成)은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16년(중종 11) 식년시(式年試)에 형제가 문과에 나란히 급제하였고, 최필성(崔弼成), 최계성(崔繼成), 최경성(崔竟成)도 모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일찍이 최수손이 집 앞에 괴목(槐木) 다섯 그루를 심으며 “내 장차 아들 다섯을 두어 모두 과거에 합격하면 이 나무에 큰 북을 걸고 쳐 소리를 크게 울리리라.” 하였는데, 그 뜻이 이루어져 거기에 정자를 짓고 북을 달아 북을 울렸다 하여 그 정자를 오고정(五鼓亭)이라 하였다. 부안읍 옹중리 중리마을 중앙에 있다. 지금 부안에 살고 있는 전주 최씨의 대부분이 이 5형제의 자손들이다.
최순성의 아들 최위(崔渭)는 청산 현감(靑山縣監)을 지냈으며, 손자 석계(石溪) 최명용(崔命龍)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학덕이 높았으나 스승 김장생보다 앞서 죽었다. 이에 김장생이 제문을 지어 슬퍼하기를 공자(孔子)가 사랑하는 제자 안자(顔子)의 죽음을 듣고 슬퍼한 일에 견주었다고 한다.
최명용의 아들 최거(崔勮)는 진사에 올랐으며 인조 반정(仁祖反正)의 공신이고, 그 아우 최경(崔勁)도 문과에 급제하여 청산 현감을 지냈으며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공을 세웠다. 최경성의 증손자 최처중(崔處中)은 무과에 급제하여 영장(營將)을 지냈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싸우다가 적에게 잡혀 청국으로 끌려갔는데 모진 고문에도 끝내 항복하기를 거부하다 죽음을 당하였다.
[현황]
2015년 인구 주택 총조사에 따르면 부안군에는 전주 최씨 2,920명이 살고 있다. 부안 지역의 전주 최씨 집성촌으로 대표적인 곳은 최생명이 입향한 부안읍 옹중리이다. 또 주산면 백석리와 진서면 진서리 연동, 변산면 지서리, 백산면 금판리 현호 등에도 세거하고 있다.
[관련 유적]
전주 최씨 관련 유물 중 최광지 홍패(崔匡之紅牌)는 2020년 4월 23일 보물 제2062호로 지정되었으며, 부안군 보안면 청자로 1493[유천리 798-4번지]에 있는 부안 청자 박물관에 있다. 부안군 부안읍 석동길 68-9[연곡리 460번지]에는 최생명을 배향한 유절암(留節庵)과 문루각인 백원루(百源樓)가 있으며, 최생명 유허비는 부안군 부안읍 월리길 5[옹중리 518-1번지]에 있다. 최수손과 최필성을 배향한 도동서원(道東書院)은 부안군 부안읍 연곡리 산36-1번지, 최생명과 최계성, 최명룡, 최활을 배향한 옹정서원(瓮井書院)은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 387-2번지에 있었으나 훼철되어 현재는 모두 터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