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5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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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邦述旌閭 |
이칭/별칭 | 광산 김공 정려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 252-25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류호석 |
건립 시기/일시 | 1988년 - 김방술 정려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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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김방술 정려 -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 252-25 |
성격 | 정려비 |
양식 | 석정려 |
관련 인물 | 김방술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130㎝[높이]|46㎝[너비]|21㎝[두께] |
소유자 | 광산 김씨 |
관리자 | 광산 김씨 |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에 있는 김방술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988년에 세운 비.
[건립 경위]
김방술(金邦述)의 본관은 광산이다. 순조 연간에 부안군 하서면 청서리에서 태어났다. 김방술은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날마다 산에 올라가 걷지 못하는 아버지의 다리가 펴지게 해 달라고 기도를 올렸다. 김방술의 간절한 정성에 감응하여 약을 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그라들었던 아버지의 다리가 갑자기 펴지면서 무려 30년 만에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바깥출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고을의 선비들이 관에 김방술의 정려를 청하는 글을 올리면서, “그의 효행은 쇠도 뚫고 돌도 쪼갤 수 있으니 어느 신(神)인들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칭찬하였다. 조정에서는 김방술의 효성을 가상히 여겨 1901년(고종 38) 김방술에게 동몽교관(童蒙敎官)의 관직을 내렸다. 김방술은 뒤에 행안면 청교리[현 부안군 행안면 신기리 청교마을]로 이사하였다. 비석의 뒷면에 적힌 석정기(石旌記)에 따르면, 1988년에 와서 김방술의 후손들이 선조의 효행 사적을 기리기 위하여 김방술 정려(金邦述旌閭)를 건립하였다.
[위치]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 252-25번지에 있다.
[형태]
화강암으로 난간을 만들고 그 안에 네 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기둥 위에 지붕 모양의 개석을 올리고, 상부에는 두 마리의 용을 새겼다. 비석은 네 개의 기둥 안쪽 중앙에 있다. 화강암의 사각형 받침돌 위에 비신을 세우고 개석을 올렸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130㎝, 너비 46㎝, 두께 21㎝이다.
[금석문]
비석의 정면에 ‘효자 동몽교관 광산 김공지려(孝子童蒙敎官光山金公之閭)’라고 쓰여 있다. 김홍재(金弘梓)가 기문을 지었다.
[현황]
김방술 정려는 제실 뒤편 언덕에 있다. 야산을 깎아 한 단을 높게 구역을 정하였다. 화강암으로 계단을 만들어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의의와 평가]
19세기 이후의 조선에서는 전국적으로 효자와 열녀들에 대한 정려 발급이 크게 늘어났다. 특히 고종 연간에 정부에서 허가한 정려의 수는 엄청나게 늘어나서 남발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이렇게 된 데에는 충효열에 대한 정부의 포상책이 빈곤한 재정을 메우기 위한 보충 수단으로 전락한 데 그 원인이 있었다. 또한 이를 가문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금전을 동원해서라도 정부로부터 정려를 받아 가문의 위상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