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03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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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時代 |
영어공식명칭 | Joseon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선아 |
[정의]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 전라북도 부안 지역의 역사.
[개설]
부안군은 조선이 건국한 후인 1416년(태종 16) 12월 지방 관제를 개정하면서 부령현(夫寧縣)과 보안현(保安縣)을 통합하고 부안현(扶安顯)으로 하였다. 1914년 고부군 관할이었던 백산면을 받아들여 현재의 부안군이 형성되었다. 조선 시대부터 주변 해안 지역에 대한 간척 사업이 이루어지면서 육지 면적이 확대되어 행정 구역이 증가하였다.
[행정 구역의 변천]
부령현은 본래 백제의 개화현(皆火縣)이었는데, 신라 때 부령현으로 이름을 고쳐 고부(古阜)에 소속시켰고, 고려 때는 감무를 두고 보안현을 겸임하게 하였다. 보안현은 본래 백제의 흔량매현(欣良買縣)이었으며, 신라 때 희안현(喜安縣)으로 고치고 고부(古阜)에 소속시켰다. 고려 우왕(禑王) 때 부령현과 보안현으로 나누어 감무를 설치하였다. 1414년(태종 14) 보안현을 다시 부령현에 합쳤고, 1415년 두 고을로 나누었다가 8월에 다시 합쳤으며, 1416년 7월 다시 두 고을로 나누었다가 12월에 두 현을 합하고 부안현으로 고쳤다. 1417년(태종 17) 흥덕진(興德鎭)을 혁파하여 부안현에 소속시키고 부안진(扶安鎭)이라 하고, 병마사(兵馬使)가 판사(判事)를 겸임하게 하였다. 1423년(세종 5) 첨절제사(僉節制使)를 두었다가 그 뒤 현감을 두는 것으로 고치고 전주진(全州鎭)에 소속시켰다. 1895년(고종 32) 전국의 부·목·군·현의 이름을 군(郡)으로 통일하면서 부안군(扶安郡)으로 개칭하였다. 부안은 개화(皆火), 부령(扶寧), 계발(戒發), 보안(保安), 낭주(浪州), 흔량매(欣良買) 등으로도 불렸다.
[교통과 도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사방 경계[사경(四境)]는 동쪽으로 김제(金堤)에 이르기까지 11리, 서쪽으로 바다 어귀에 이르기까지 60리, 남쪽으로 흥덕(興德)에 이르기까지 37리, 북쪽으로 만경(萬頃)에 이르기까지 11리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동쪽으로 김제군(金堤郡)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3리, 남쪽으로 고부군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8리, 흥덕현(興德縣)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52리, 북쪽으로 만경현(萬頃縣)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2리, 서쪽으로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11리, 서울과의 거리는 577리라고 나온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동쪽으로 김제군과의 경계에 있는 동진에서 오는 길이 10리이고, 서쪽으로 바닷가까지 오는 길이 60리, 남쪽으로 고부군과의 경계에서 노교(蘆橋)에서 오는 길이 20리, 북쪽으로 만경현과의 경계에 있는 북창까지 가는 길이 10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호구와 성씨]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부안 지역의 인구가 323호, 1,662명으로 나와 있다. 군정은 시위군이 19명, 진군이 38명, 선군이 304명이다. 부령(扶寧)의 토성(土姓)은 김(金)·장(張)·황(黃)·신(辛)·이(李)이며, 속성(續姓)은 심(沈)이다. 보안(保安)의 토성은 한(韓)·황(黃)·송(宋)이고, 속성은 임(林)이다. 고촌(皷村)의 망성(亡姓)은 호(扈)라고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재된 성씨는 부령을 본관으로 하는 김·장·황·이·신(辛), 심이 있는데 내성(來姓)이며, 보안을 본관으로 하는 한·송·황·호(扈)·안(安)·임(林)·임(任)이 있으며 고촌의 망성으로 호가 있다.
영조(英祖) 대인 1757년(영조 33)에서 1765년(영조 41) 사이에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호적에 편성된 민호(民戶)는 6,625호이며, 이 중 남자가 1만 4599명, 여자는 1만 9277명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성씨는 부령을 본관으로 하는 김·장·황·이·신(辛)·심(沈)과 보안을 본관으로 하는 한·송·호·안·임(林)·임(任)과 최(崔)[전주(全州)], 유(柳)[진주(晉州)]가 있다. 이 외에 허(許)[태인(泰仁)]·고(高)[제주(濟州)]·박(朴)[밀양(密陽)]·민(閔)[여흥(驪興)]·윤(尹)[파평(坡平)]·채(蔡)[평강(平康)]·조(趙)[함열(咸悅)]·성(成)[창녕(昌寧)]·나(羅)[나주(羅州)]·오(吳)[군위(軍威)]·전(田)[연안(延安)]·정(鄭)[동래(東萊)]·강(姜)[진주(晋州)]·장(蔣)[아산(牙山)]·탁(卓)[광산(光山)]·신(申)[평산(平山)]·남(南)[의령(宜寧)]·홍(洪)[남양(南陽)]이 있다.
[정유재란과 호벌치 전투]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북도 고창과 부안 지역의 사족인 채홍국(蔡弘國)과 고덕붕(高德鵬) 등 92명은 이른바 ‘삽혈 동맹(揷血同盟)’을 맺고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1597년(선조 30) 일본이 재침하여 호남 지방을 공격하자 다시 의병을 조직하고 일본군과 부안의 호벌치에서 전투하였다. 부안 김씨(扶安金氏) 사족인 김홍원(金弘遠)은 왜군이 침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피신한 사람들을 설득하여 의병을 조직한 후 채춘봉과 함께 호벌치 전투에서 일본군을 무찔렀다. 김홍원은 임실로 이동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살상하였고, 순천으로 퇴각한 일본군을 석보창에서 공격하였다.
호벌치 전투 시기와 관련하여 1597년 3월 23일부터 4월 23일까지 전투가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기도 하지만, 이때는 일본군이 아직 부안으로 진입하기 전이기 때문에 1597년 8월 남원성 전투 이후 1597년 8월 하순에서 9월 20일 즈음으로 추정된다. 호벌치 전투는, 비록 일본군을 격퇴하지는 못하였으나 지방의 사족과 양민, 승려 등이 결집하여 일본군에 대항한 항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변산적과 무신란]
17~18세기에 발생한 천재지변(天災地變)으로 전염병이 유행하고 민심(民心)이 흉흉한 상황에서 양역의 폐단까지 겹치며 유민(流民)과 도적떼가 증가하였다. 바다와 산이 어우러져 물산이 풍부한 변산에는 특히 유민이 많이 몰려들었다. 당시 변산 일대를 무대로 활동한 명화적(明火賊)을 변산적이라고 불렀다.
영조(英祖)의 즉위로 정치적 위기에 직면한 소론의 준론은 소외되었던 남인을 포섭해 ‘경종(景宗) 독살설’을 명분으로 영조를 폐위하고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을 추대하려고 모의하였다. 1728년(영조 4) 3월 15일 호서 세력 이인좌(李麟佐)가 거병하자 3월 20일 영남 세력이 안의와 거창에서 거병하였고, 같은 날 호남 세력도 태인에서 거병하였다. 이인좌가 청주성을 점령하자 전라도 태인현의 박필현을 중심으로 호남 세력도 움직이기 시작하였는데, 부안의 사족 고응량과 성득하[정세윤의 사촌], 고효점, 성상하, 진사 김수종(金守宗)과 박창한, 김창수, 파총 임진량 등 10명이 호응하였다. 무신란을 일으킨 세력은 부안과 변산을 배경으로 활동한 명화적을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당시 태인·부안·변산 지역에서 활동하던 명화적은 약 400~500여 명으로 추산되는데 녹림당이라고도 불렀다. 특히 이인좌의 공초에서 반란군으로 거론된 ‘호남의 변산적 200명’은 부안의 부호였던 김수종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동학 농민 혁명과 백산 대회]
1800년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즉위한 이래 ‘안동 김문’ 등은 60여 년간 권력을 장악하였다. 세도 정권(勢道政權)에 의해 삼정(三政)이 문란하게 운용되면서 1862년(철종 13) 임술 농민 항쟁을 비롯한 농민 항쟁이 전국 각지에서 발생하였다. 1894년(고종 31) 1월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과 수탈에서 비롯된 농민 항쟁은 이전과는 달리 그 해 3월 20일 ‘무장 기포’를 거쳐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다. 농민군 지도자로 추대된 전봉준(全琫準)은 손화중(孫華仲)·김개남(金開南)과 연합하여 고부뿐 아니라 호남 군현의 농민들에게 참여를 독려하여 동학 농민군을 조직하였다.
동학 농민군은 3월 26일 무장에서 기포한 병력과 기존에 백산[당시는 고부군 백산]에 있던 병력, 제주도 등 각지에서 이동해 온 병력이 모여 이른바 백산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후 동학 농민군은 고부·태인·부안을 점령하였고 황토현에서 감영군을 맞아 크게 승리하였다. 이후 동학군은 남진하여 흥덕·고창·무장·영광·나주를 거쳐 장성에서 중앙군까지 격파하고 조선왕조의 본향이자 호남의 수부(首府) 전주성을 함락하였다. 최근에 발굴된 부안 유생(儒生) 기행현(奇行鉉)의 『홍재일기(鴻齋日記)』에는 백산 대회 이전에는 이들을 ‘동학인(東學人)’으로 기술하였으나 백산 대회 이후에는 ‘동학군(東學軍)’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백산 대회를 통해 ‘동학 농민군’으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봉준의 지휘 아래 동학 농민군은 백산에 결집하여 군사 훈련을 하였는데, 흰옷을 입고 죽창을 든 동학 농민군으로 뒤덮인 백산은 “앉으면 죽산(竹山), 서면 백산(白山)”이 되었다고 한다. 그동안 일부 학자들은 오지영의 『동학사(東學史)』에만 기술되어 있다는 이유로 백산 대회의 실체를 부정하였으나 기행현의 『홍재일기』에 3월 26일로 추정되는 일자가 확인되며 역사적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