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1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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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梅窓-梨花雨-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병용 |
[정의]
매창(梅窓)[1573~1610]은 조선 중기 조일 전쟁[임진왜란] 시기에 부안을 중심으로 활동한 기녀이자 시인이다. 한시와 시조, 가무와 현금에도 능한 다재다능한 예술인이었다. 생전에 유희경(劉希慶)[1545~1636], 허균(許筠)[1569~1618], 이귀(李貴)[1557~1633] 등 당대 명사들과 깊이 교유했다. 문집으로 『매창집(梅窓集)』이 전하며, 「추사(秋思)」·「춘원(春怨)」·「견회(遣懷)」·「증취객(贈醉客)」·「부안회고(扶安懷古)」·「자한(自恨)」 등이 유명하다.
[기녀로 태어나 예인으로 살다]
매창은 1573년(선조 6) 부안에서 태어나 1610년(광해군 2)에 사망하여 현 부안군 부안읍 봉덕리 ‘매창뜸[매창이뜸]’에 묻혔다. 부친은 부안의 향리(鄕吏)인 이탕종(李湯從) 혹은 이양종(李陽從)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찍 죽은 것으로 알려진 모친은 조선 시대 신분제의 근간이었던 종모제(從母制)와 매창에 대한 여러 기록을 감안하면 관비 혹은 관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명은 향금(香今)으로 알려져 있으며 계유년(癸酉年) 출생이라고 하여 계생(癸生), 계랑(癸娘)으로 불리었다 하고 동음자인 ‘계생(桂生)’, ‘계랑(桂娘)’도 쓰였다. 자(字)는 천향(天香)이다. 처음에는 ‘섬초(蟾初)’라는 호도 사용했고 가장 널리 알려진 ‘매창(梅窓)’은 그녀의 자호(自號)다. 천향, 계생, 매창 등의 호칭을 통해 예인(藝人)과 기녀의 삶이 동시에 느껴진다. 매창은 부친으로부터 글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거문고와 춤과 노래에도 능했다고 한다.
만 37세를 일기로 수명을 다한 매창은 평생 그의 손을 떠나지 않았던 거문고와 함께 묘에 묻혔으며, 사후 45년이 지난 1655년에 그를 추모하는 부안 사람들에 의해 묘비와 상석(床石)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비문이 마멸되자 일제 강압기인 1917년에 또 한 번 부안 사람들이 힘을 모아 묘비를 다시 세웠고, 현재 그 묘역과 묘비 등은 1983년 전라북도 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됐다. 지금도 음력 4월 5일에는 부풍율회(扶風律會)가 ‘매창제’를 지내고 있으며 현재 부안군에서는 매창의 묘역을 매창 테마 공원으로 조성해 운영 중이고, 부안 문인들에 의해 학생 백일장 등 다양한 행사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그녀는 생전 수백 편의 시편을 지었다고 하지만, 현재 전해지는 것으로는 매창 사후 58년 뒤인 1668년에 부안 사람들이 흩어져 있던 유고를 수집해 변산 개암사(開巖寺)에서 2권 1책 목간본으로 펴낸 『매창집』에 실린 한시(漢詩) 57수, 그리고 1876년에 박효관(朴孝寬)과 안민영(安玟英)에 의해 필사본으로 간행된 『가곡원류(歌曲源流)』에 실린 시조 「이화우 흩날릴 제…」 1수가 남았다.
『매창집』은 현재 간송박물관에 2부, 미국 하버드대학교 옌칭[燕京]도서관 한국관에 1부가 소장되어 있으며 서울대학교 가람문고에 필사본 1부가 보관되어 있다. 1956년 신석정(辛夕汀) 시인이 매창의 한시를 한글로 풀어 쓴 『매창집』이 낭주매창집간행회(浪州梅窓集刊行會)에 의해 발간되었으며, 이후 신석정 대역본은 부안문화원에서 간행한 『매창전집』에 전재(轉載)되었다.
『매창집』에는 총 58수의 한시가 실려 있으나 그중 「윤공비(尹公碑)」는 매창이 거문고를 타며 시를 읊던 모습을 허균의 지인인 이원형(李元亨)이 글로 옮긴 것이 매창의 시로 오인되어 잘못 등재된 것으로 밝혀졌다. 또, 이능화(李能和)[1869~1943]가 1927년에 펴낸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는 작자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몇몇 시조가 매창이 지은 것으로 등재되어 혼란이 있었으나, 이후 연구자들이 작자 미상의 그 작품들이 매창과 큰 관련이 없는 것으로 정리했다.
[조일 전쟁의 피구름 속에 명멸한 문학 청춘]
매창의 삶은 임진왜란·정유재란으로 흔히 불리는 조일 전쟁[1592~1598]의 전란기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1592년, 일본군의 침공으로 시작된 조일 전쟁은 조선 전역을 전란의 참화에 밀어 넣었으며, 7년 동안 지속된 전쟁은 당시 사람들의 삶에 살육과 피난, 이산, 굶주림 등의 깊은 상흔을 남겼다. 매창의 경우 막 이십 대에 접어듦과 동시에 전란기의 혼란스러운 와중에 빨려 들어가게 된다.
이순신(李舜臣)의 『난중일기(亂中日記)』에도 부안 해변과 위도(蝟島)에는 수없이 많은 피난민들이 몰려와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참상과 이곳을 노략질하는 일본군의 만행이 기록되어 있으며, 1597년 일본군의 침탈에 맞서 싸운 부안 의병들의 호벌치(胡伐峙) 전투는 그 치열하고 처절한 기록이 지금까지 전한다. 즉, 매창의 삶터였던 부안 땅은 그 당시 아수라장이었으며 생지옥과 같은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매창과 함께 조선 명기(名妓)로 이름이 높은 황진이(黃眞伊)[?~?]는 전란이 없었던 중종 시대를 풍미했고, 매창과도 인연이 깊었던 허균의 손위 누이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이 조일 전쟁 발발 전에 세상을 등졌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매창은 조선조 다른 여성 문인들보다 훨씬 더욱 가혹한 환경에 노출된 채 그 시대를 통과했다고 할 수 있다.
매창은 생전 유희경, 허균, 이귀 외에도 이름과 신분을 특정할 수 없는 이들과도 교분을 맺은 것으로 보이나, 그 교류의 끝에 매창의 시편에 맺힌 것은 지독한 외로움이나 그리움이었고, 자신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한 채 부안 땅에 고립되어 있다는 격절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매창의 이름이 전국 문사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조일 전쟁이 끝난 뒤였지만, 전란이 남긴 폐허만 흉흉하던 그때 역시 나라와 백성, 국토가 모두 깊은 상처를 끌어안고 신음하고 있을 때였다. 매창의 문학적 재능은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 전란 속에서 홀로 피고 만개했다가 질 수밖에 없었다. 매창의 청춘과 문학은 조선 건국 이후 최대의 국난이었던 조일 전쟁의 자욱한 피구름 속에서 명멸한 셈이다.
[매창과 유희경, 짧은 만남 긴 이별]
매창의 비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생애는 그녀의 평생 연인이었던 유희경의 삶과 함께 살펴보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둘 사이의 짧은 만남과 긴 이별 사이에는 전란이라는 국가적 비상 상황이 개입한다. 유희경 또한 천출이었으나 일찍 시재(詩才)를 드러내어 박순(朴淳)[1523~1589]에게 당시(唐詩)를 사사하였으며 노비 출신인 백대붕(白大鵬)[?~1592]과 함께 ‘풍월향도(風月香徒)’라는 시회를 조직하여 당대에 문명을 떨치고 있었다. 풍월향도는 조선 후기 양반 위주의 문학에 맞선 중인·평민 위주 위항 문학(委巷文學)의 효시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여기에는 박계강(朴繼姜)[?~?], 정치(鄭致)[?~?], 최기남(崔起南)[1559~1619] 등의 문인들이 참여했다.
이외에도 유희경은 당대의 명사들이었던 유몽인(柳夢寅)[1559~1623], 이수광(李睟光)[1563~1628], 임숙영(任叔英)[1576~1623], 차천로(車天輅)[1556~1615] 등과 문학적 교류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전국적으로 문명을 떨치던 유희경은 임진왜란 발발 1년 전, 부안에 들렀다가 매창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곧 전쟁이 터지고 유희경이 의병에 참여하면서 매창과는 만나기 힘든 사이가 되었다. 매창이 유희경을 그리워하며 남긴 시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송백방맹일(松柏芳盟日)[송백으로 지은 맹세 비길 양이면]
은정여해심(恩情與海深)[저마다 깊은 물에 못지않으리]
강남청조단(江南靑鳥斷)[강남선 소식 올 길 바이 없어]
중야독상심(中夜獨傷心)[홀로 새는 밤이 더욱 설어라][신석정 역, 「고인(故人)」]
동풍일야우(東風一夜雨)[동부새 한 밤을 비가 오는데]
유여매쟁춘(柳與梅爭春)[매화랑 버들이랑 봄을 시새워]
대차최난감(對此最難堪)[잔 들어 이 자리에 그댈 보내기]
준전석별인(樽前惜別人)[차마 사람으론 못할 일이야][신석정 역, 「자한(自恨)」]
유희경 또한 매창을 그리워하며 많은 시를 남겼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유희경의 한시 10여 편 이상이 매창을 그리워하며 쓴 것이다. 대개는 중국의 고사, 특히 당 현종(玄宗)과 양 귀비(楊貴妃)의 비련에 빗대어 자신의 그리움을 표현한 것들이다. 유희경이 처음 매창을 만나 쓴 시는 이렇다.
증문남국계랑명(曾聞南國癸娘名)[일찍이 남국에 계량 이름 소문 나]
시운가사동낙성(詩韻歌詞動洛城)[글 솜씨 노래 재주 서울까지 울리더니]
금일상간진면목(今日相看眞面目)[오늘에야 그 모습 대하고 보니]
각의신녀하삼청(却疑神女下三淸)[선녀가 떨쳐 입고 내려온 듯 하구나][김지용 역, 「증계랑(贈癸娘)」]
매창과 유희경이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그로부터 15년 이상 세월이 흐른 뒤였고, 이때 이미 매창은 시들고 있었다. 전란과 전후 복구의 혼란기 속에 10대 후반이었던 미기(美妓) 매창은 30대 중반을 넘어선 퇴기(退妓)가 되고 만 것이었다. 전란이 그녀의 시간을 모두 앗아간 것이다.
유희경이 『촌은집(村隱集)』에 남긴 기록에 의하면 매창과 유희경은 전주에서 만나 열흘 이상 함께 지내며 회포를 푼 것으로 보인다. 그리움과 반가움 그리고 무정하게 흘러간 시간과 재회를 기약할 수 없는 심정을 담은 매창의 시가 있다.
상사도재불언리(相思都在不言裏)[애 끓는 정 말로는 할 길이 없어]
일야심회발반록(一夜心懷髮半綠)[밤새워 머리칼이 반 남아 세였구나]
우지시첩상사고(憂知是妾相思苦)[생각는 정 그대도 알고프거든]
수시금환감구위(須試金環減舊圍)[가락지도 안 맞는 여읜 손 보소][신석정 역, 「규원(閨怨)」]
유희경 또한 매창과 헤어지고 그리움을 담아 쓴 시를 남겼다.
별후중봉미유기(別後重逢未有期)[헤어진 후 다시 만날 기약은 없어]
초운진수몽상사(楚雲秦樹夢相思)[멀리 떨어진 그리운 꿈속에도 이네]
하당공의동루월(何當共倚東樓月)[언제나 함께 동쪽 달을 볼꺼나]
각하완산취부시(却話完山醉賦詩)[아 이제 완산에서 취했던 시나 읊조릴 밖에][최승범 역, 「기계랑(寄癸娘)」]
이 열흘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생전에 연락을 나눈 기록이 없다. 매창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유희경은 회억(回憶)을 담은 시를 몇 편 더 남겼다. 유희경이 80세에 썼다고 알려진 시이다. 설중매(雪中梅)를 보며 매창을 추억한 듯 하다.
하인방아고시비(何人訪我叩柴扉)[그 누가 나를 찾아 싸리문을 두드리나]
이락요요난설비(蘺落寥寥亂雪飛)[담은 헐어 쓸쓸한데 난설만 흩날린다]
독대한매금영족(獨對寒梅今詠足)[홀로 앉아 설중 매화나 읊고 삶이]
노부서식차중의(老夫棲息此中宜)[늙은 나의 사는 보람 고작이라네][김지용 역, 「설중상매(雪中賞梅)」]
전란의 참상을 목도하며 매창이 시든 것에 비하면, 유희경의 삶은 전란 이후, 매창의 사후에 더욱 빛난다.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참여하고 호조(戶曹)의 일을 도운 공로로 면천(免賤)되면서 그의 재능과 명성은 더욱 높아진다. 조선 최초의 양명학자라 평가받는 남언경(南彦經)[?~?]의 슬하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특히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주자가례(朱子家禮)』]를 깊이 공부하였던 유희경은 신분의 제약이 사라진 뒤 당대 최고의 예학자(禮學者)로 대우받아 국상(國喪)까지 자문했다 하며 『상례초(喪禮抄)』라는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또, 유희경은 조일 전쟁 종군의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제수받고, 1623년 인조반정 이후에는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1560~1623]이 주도한 인목대비 폐모에 반대한 절의를 인정받아 가선대부(嘉善大夫), 나이 80세에 이르러선 장수한 노인에게 경로의 뜻으로 수여하는 수직(壽職) 가의대부(嘉義大夫), 사후에는 아들의 공로로 자헌대부 한성판윤(資憲大夫漢城判尹)에 추증(追贈)되었으니 명예도 충분히 누렸다. 매창보다 28살이 많았던 유희경은 매창 사후에도 26년을 더 살았으며 말년에는 자신의 거처인 침류대(枕流臺)에서 당대의 문사들과 지속적인 교류를 하며 92세까지 살았다. 후손에 의해 그의 호를 딴 『촌은집(村隱集)』이 3권 2책의 목활자본으로 간행됐다.
이처럼 매창과 유희경의 삶을 함께 살펴 대조해 보면, 같은 천출이고 문학적 재능을 타고났다 하여도 남성인 유희경은 상대적으로 활달하게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국난의 시기를 맞아서는 의병으로 종군함으로써 신분의 제약을 깨트리고 면천을 쟁취할 수 있었던 반면, 매창은 평생 부안을 벗어나지 못했을 뿐더러 자신의 신분적 제약을 벗어날 꿈조차 꿀 수 없는 시대를 천기(賤妓)라는 신분으로 살아야만 했던 게 더욱 뚜렷하게 대비된다.
유희경이 말년을 보낸 것으로 알려진 서울의 도봉산(道峯山) 입구에는 지난 2012년 도봉구청에서 두 사람이 서로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시비를 세웠다. 시비의 왼편에는 유희경의 한시 「회계랑(懷癸娘)」이 새겨져 있다.
낭가재낭주(娘家在浪州)[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아가주경구(我家住京口)[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상사불상견(相思不相見)[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장단오동우(腸斷梧桐雨)[오동에 비 뿌릴 젠 애가 끊겨라]
시비의 오른편에는 매창이 남긴 그 유명한 시조 「이화우 흩날릴 제…」가 대련(對聯)처럼 새겨져 있다.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매창과 허균, 평생 문학으로 교유하다]
평생을 외롭게 그리워했던 유희경과 달리, 전란 직후 인연을 맺게 된 허균은 신분을 뛰어넘어 매창과 금란지교(金蘭之交)를 맺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허균은 부안에서 시 짓기를 즐기던 지방 관기 매창을 전국적 여성 문인으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발판을 놓아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허균의 소개에 의해 매창의 삶과 그녀의 문학은 후대에 전해지게 된다.
1601년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의 조운(漕運)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전운판관(轉運判官)으로 내려온 허균은 이 당시의 행적을 「조관기행(漕官紀行)」에 남기는데 (음) 7월 23일자에 매창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23일 부안에 도착하니 비가 몹시 내려 머물기로 했다. 고홍달이 찾아와 만났다. 창기(倡妓) 계생(桂生)은 이옥여(李玉汝)의 정인이다.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는데 생김새는 대단치 않으나 재주와 정감이 있어 함께 이야기할 만 했다. 종일 술을 마시고 시를 주고받았다. 밤이 되자 계생은 자신의 조카를 내 침소에 들이니, 이는 오해를 피하기 위한 일이다.”
허균이 남긴 이 짧은 기록은 당시 상황에 대해 여러 가지 짐작을 가능하게 해준다. 당대 명문가의 자제로 이미 문명을 떨치던 허균과 종일 시담을 나눌 만큼 매창이 문학적 성취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당시 기생의 역할, 그리고 허균과 이귀의 관계, 또 매창의 절도를 짐작케 해준다. 여기 언급된 ‘옥여(玉汝)’는 훗날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이 되는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를 일컫는 것으로 그 무렵에 김제군수로 봉직했었다. 이귀와 매창의 관계는 이 글에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 잠시 정교를 나눈 사이인 것으로 보인다.
매창에게 강한 인상을 받은 허균은 1608년 다시 부안을 찾아 우반동(愚磻洞)[현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에 거주하며 매창, 해안(海眼)[1567~?]이라는 시승(詩僧)과 함께 교유하며 명승절경을 찾아다니고 시담을 나누었다. 많은 연구자들은 이 무렵 허균을 통해 매창에게 허난설헌의 시나 불교, 도교적 사상이 전수된 것으로 추정한다.
다시 서울로 돌아간 허균은 뜻하지 않게 매창과의 염문에 시달리기도 한다. 허균이 1611년 파직을 당하고 함열[현 전라북도 익산시 함열읍]에 머물며 쓴 『성수시화(惺叟詩話)』에 이때의 내용이 담겨 있다.
매창이 가깝게 지내던 태수가 있었는데 그가 떠나자 그를 위해 세운 송덕비 앞에서 매창이 달밤에 거문고를 켜며 노래를 했는데, 이를 본 이원형이라는 사람이 위에 언급한 「윤공비」라는 시를 지었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매창이 서울로 떠난 허균을 그리워하며 쓴 시로 소문이 난 것이었다. 이로 인해 허균은 사헌부로 세 차례에 걸쳐 탄핵을 받게 된다. 허균은 매창이 죽기 1년 전에 해당하는 1609년 1월 이런 편지를 쓴다.
“아가씨는 보름달 저녁에 비파를 타며 산자고(山鷓鴣)를 읊었다는데, 왜 한가하고 은밀한 곳에서 하지 않고 바로 윤비(尹碑) 앞에서 하여 남의 허물 잡는 사람에게 들키고, 거사비(去思碑)를 시로 더럽히게 하였는가. 그것은 아가씨의 잘못인데, 비방이 내게로 돌아오니 억울하오. 요즘은 참선을 하는가, 그리운 정이 간절하오. 봉래산의”[최승범 역]
원정(怨情)의 마음을 담아 시작된 허균의 편지에는 말미에 오히려 허균이 매창을 생각하는 마음이 듬뿍 드러나는 것으로 끝맺는다. 같은 해 9월에 쓰여진 허균의 편지는 두 사람의 관계를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게 해준다.
“봉래산의 가을도 한창 무르익었으리. 가 보고자 하는 흥취가 굽일어 드오. 아가씨는 반드시 이 늙은이가 시골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웃겠지. 그 시절에 만약 한 생각이 잘못 됐더라면 나와 아가씨의 사귐이 어떻게 10년 동안이나 이토록 다정할 수 있었겠는가. 이제 와서 송나라 때의 풍류객 진회해(秦淮海)는 참다운 사내가 아니고 망상(妄想)을 끊는 것이 몸과 마음에 유익한 줄을 알았을 것이오. 어느 때나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을는지. 종이를 대하니 마음이 서글프오.”[최승범 역]
매창이 이에 대해 어떤 답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매창은 이 편지를 받은 다음 해에 숨을 거둔다. 이 편지를 통해 허균은 자신들이 정욕에 사로잡히지 않고 청교(淸交)를 나누었기에 10년이 넘게 이렇게 스스럼없이 서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음을 은연중 밝히고 있다. 자유분방한 삶을 살며 여성 편력으로 풍파를 일으켰던 허균에게서는 참으로 나오기 힘든 고백이 아닐 수 없다. 이 편지를 통해 허균과 매창이 문학적 도반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매창이 죽고난 뒤 허균은 애도시 「애계랑(哀桂娘)」과 함께 소회를 담은 주석을 함께 남겼다.
묘구감나금(妙句堪擒錦)[신묘한 글귀는 비단을 펼쳐 놓은 듯]
청가해주운(淸歌解駐雲)[청아한 노래는 가는 바람 멈추어라]
투도래하계(偸桃來下界)[복숭아를 훔친 죄로 인간에 귀양 왔고]
절약거인군(窃藥去人群)[선약을 훔쳤던가 이승을 떠나다니]
등암부용장(燈暗芙蓉帳)[부용의 장막에 등불은 어둑하고]
향잔비취군(香殘翡翠裙)[비취색 치마에 향내는 남았구려]
명년소발도(明年小發桃)[명년이라 복사꽃 방긋방긋 피어날 제]
수과설도분(誰過薛濤墳)[설도의 무덤을 어느 뉘 찾을는지][민족문화추진회 역]
계생은 부안의 기생인데, 시에 능하고 글도 이해하며 또 노래와 거문고도 잘 했다. 그러나 천성이 고고하고 개결하여 음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재주를 사랑하여 사귐이 막역하였으며, 비록 웃고 이야기하며 가까이 지냈으나 어지러운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다. 때문에 오래 가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죽음을 듣고 한 차례 눈물을 뿌리고서 율시 2수를 지어 슬퍼한다.
허균은 매창 사후 2년 뒤에 다시 부안으로 내려와 우반동 정사암에 머물렀고, 이 즈음 『홍길동전』을 집필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쩌면 당대 매창을 그 누구보다 가장 깊게 이해해 주었을 당대의 풍운아 허균은 1618년에 역모 혐의로 죽음을 맞는다.
[매창 사후에 남은 이야기]
부안 지역에는 매창에 관련된 다양한 설화가 전승되고 있다. 몇 백 년 동안 매창의 묘를 부안의 총각 나뭇꾼들이 자발적으로 벌초해 주었다는 이야기, 부안에 오는 사람들마다 『매창집』을 찾는 바람에 인쇄 비용이 부담스러웠던 개암사 승려가 목각판을 불태웠다는 이야기, 영조 시절에 부안에서 활동한 또 다른 유명 시기(詩妓) 복랑(福娘)의 모친이 매창의 후손이라는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생전에 천기로 외롭게 살았지만, 그 외로운 절창으로 말미암아 매창은 사후 500년이 넘도록 부안 사람들의 연인이자 긍지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