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13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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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邊山半島-守護女神,開洋- |
이칭/별칭 | 수성당 할미 이야기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
시대 | 시대 미상 |
집필자 | 김영미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64년 - 개양할미를 모신 수성당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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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유적 | 수성당 -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적벽강길 54[격포리 산35-17] |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죽막동에서 서해안 해양 문화를 중심으로 전해 내려오는 거인형 여신 이야기.
[개설]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의 죽막(竹幕)마을에 개양할미에게 제의를 드리는 수성당(水聖堂)이 있다. 1994년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이곳을 조사한 결과, 4세기 중반부터 이미 제의가 이루어진 곳임을 알 수 있는 제사 유적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일반적으로 당 신화는 제사 공동체의 구전을 통해 전승된다고 볼 때, 수성당의 개양할미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 시대부터 전승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상량문의 기록을 보면, 19세기(1864년)부터는 ‘수성당’이라는 제당이 설립되고 1910년, 1940년, 1973년에 개축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까지 수성당에서는 정월 열 나흗날에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수성당 내부에는 개양할미와 개양할미의 여덟 딸을 그린 당신도(堂神圖)가 모셔져 있다. 수성당의 당신인 개양할미는 작게는 변산면 격포리 죽막동마을의 수호신이며, 크게는 칠산 바다를 관장하는 바다의 신으로 기능하고 있다. 칠산 바다는 연평도와 함께 조기잡이의 3대 어장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개양할미는 조기잡이 어장의 중심지인 칠산 바다를 관할할 정도로 신력이 강력하여, 예부터 어부들의 안전을 돌보면서 고기를 많이 잡게 하는 수호신으로 기능하고 있다.
[변산반도와 개양할미]
변산반도 일대에서는 개양할미 또는 수성할미에 관한 신화가 사람들 사이에서 구전되고 있는데 그 대략적인 이야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개양할미 이야기이다. 아주 먼 옛날 개양할미는 수성당[옛날에는 ‘구낭사(九娘祠)’라고 했음] 옆의 여울굴에서 나와 딸 여덟 명을 낳는다. 일곱 명의 딸은 위도, 영광, 고창, 띠목 등 칠산 바다의 중요한 지점 당집에 나누어 보내서 바다를 지키게 하고, 개양할미는 막내딸만 데리고 수성당에 머물며 바다를 다스리며 살았다. 개양할미는 키가 어찌나 큰지 굽 나막신을 신고 서해 바다[칠산 바다]를 걸어 다녔는데, 바닷물이 고작 발등 위로 조금 올라올 정도거나 아무리 깊어도 물이 무릎까지 차지 않을 만큼 장대했다고 한다.
거신 개양할미는 바다를 걸어 다니면서 위험한 곳을 표시하기도 하고, 물결이 거센 곳은 잠재우기도 한다. 또한 곰소의 ‘계란여’처럼 바다가 깊은 곳에서 자신의 치마가 젖자 화가 나서 육지에서 치마에 흙과 돌을 담아 날라서 계란여를 메웠다고 한다. 어부들이 바다 멀리 고기잡이를 나가 돌아오지 못할 때는 개양할미는 당에 들어가서 바다에 들어갈 옷을 갈아입고 서해 바다 물속으로 들어가서 어선과 어부를 구해 오기도 했다. 이곳 변산 격포 죽막동 사람들은 지금도 수성당의 개양할미를 잘 받들어야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고, 바다에서 풍랑의 위험도 면할 수 있다고 믿어 정월 열 나흗날에 당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이 개양할미 이야기에서 개양할미는 변산 격포 죽막동 마을과 국가를 수호하며, 변산 어부들이나 선원들의 안전을 돌보면서 고기를 많이 잡게 하는 해양 수호 여신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라고 하겠다.
또한 개양할미가 막내딸은 보듬고 있고, 다른 일곱 명의 딸들은 바느질을 하고 있는 내용의 설화가 채록되기도 한다. 개양할미는 하얀 옷을 입고 키가 우뚝 솟은 모습으로 앉아있는데, 딸들은 긴 댕기를 딴 모습으로 빨강, 노랑 등 색깔이 고운 옷을 입고 개양할미 옆으로 앉아있다는 설화도 있다.
한편 수성당과 관계된 철마 이야기도 전승되고 있다. 죽막동의 마음씨 착한 형제가 앞을 못 보는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하루는 형이 고기를 잡으러 나가서 돌아오지 않자 아우가 형을 찾으러 나가서 아우 역시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 아들들을 기다리다 지친 홀로 남은 어머니가 형제를 찾으러 나갔는데, 그곳이 바로 수성당 옆 대마골 절벽이었다. 어머니는 앞이 보이지 않아 절벽 밑 여울굴 속으로 떨어져 죽고 만다. 그 후 형제가 돌아왔을 때 당굴에서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황금 부채 2개를 주며 하나는 나라를 구하고, 또 하나는 마을을 구하라고 하였다. 또한 어머니는 자신이 잘 모시고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형제는 백발노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수성당을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당굴에서 철마가 나타났다. 형제들은 왜구가 나타났을 때나 마을 사람들이 풍랑으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철마를 타고 나가 도인이 준 부채로 왜구를 물리치고 풍랑을 잠재웠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신적인 존재로 ‘백발노인’이 등장하는데 연구자들에 따라 백발노인을 개양할미나 혹은 장사로 보기도 한다. 백발노인의 존재가 개양할미든지 혹은 장사든지 변산 격포에 위치한 수성당의 신성성을 부여하는 이야기이며, 아울러 수성당에 좌정한 개양할미의 신성성도 담보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개양할미 이야기에 나타난 모티프로 변산 읽기]
변산반도에 전승되는 개양할미 이야기를 몇 개의 모티프로 정리해 보면서 이 설화가 지니고 있는 특성 및 부안 변산의 지역성을 파악해 본다.
첫째, 개양할미 이야기에서는 ‘나막신’ 모티프를 주목할 만하다. 개양할미는 굽 나막신을 신고 바다를 걸어서 건너다니는 거인으로 등장한다. 굽 나막신은 일차적으로 발이 빠지지 않도록 신는 것으로 ‘부안 변산’이라는 해양 지역과 관련된 것이다. 여신들이 나막신을 신는다는 설정은 주로 물과 관련되며, 해양 지역 설화에서 볼 수 있는 화소이다. 이외에 굽 나막신은 거인 상징을 돋보이게 해주는 모티프로 작용하고 있다. 즉 개양할미는 키가 장대해서 굽 나막신 정도만 신으면 바다에서 걸어 다닐 때 바닷물이 발에 잠기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과 관련된 해양신이며 거인형인 제주도의 「설문대할망 설화」에서도 ‘나막신’ 모티프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나막신에서 ‘해양’과 ‘거인’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설문대할망 설화」에서 설문대할망은 신고 있던 나막신으로 바닷가에 있는 흙을 퍼서 한라산을 쌓았고, 할망이 걸을 때마다 나막신에서 떨어진 흙덩이가 오름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둘째, ‘수심 재기’ 모티프를 통해 변산 앞바다[곰소 등], 칠산 바다 등 부안 바다의 지형적 특성을 살필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개양할미 이야기와 같은 해양 거인형 설화 계열인 제주도의 「설문대할망 설화」와의 변별성도 찾을 수 있다. 설화 속의 개양할미는 변산 앞바다 및 칠산 바다 곳곳의 수심을 재고 다닌다. 수심을 재고 다니면서 물결이 거센 곳은 잠재우고, 깊은 곳은 메우기도 한다. 개양할미가 수심을 재고 다니다가 부안 곰소 앞바다 ‘계란여’에 이르렀는데, 계란여가 아주 깊어서 개양할미의 치맛자락이 약간 물에 젖는다. 부안 곰소의 계란여는 지금도 깊은 곳을 비유할 때 “곰소 둠벙[계란여] 속 같이 깊다.”라는 속담이 종종 인용될 정도로 깊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치맛자락이 젖은 것에 화가 난 개양할미는 육지에서 흙과 돌을 치마에 담아 ‘계란여’를 메웠다고 한다. 이렇게 수심을 재고 다니다가 곰소의 계란여를 메우는 화소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 무엇보다 ‘수심 재기’ 모티프를 통해 ‘곰소 둠벙의 깊이’ 등 변산 앞바다의 지형적 특성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바다의 수심을 재어 깊은 곳을 메운다는 것 자체는 개양할미의 신이한 ‘창조신적 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이다. 굽 나막신이 개양할미의 창조신적 ‘거인 외양’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화소라면, 수심 재기는 창조신적 ‘능력’을 보여주는 모티프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개양할미가 수심을 재는 근본적인 이유는 깊은 바다에 빠져 위험에 처해질 수 있는 어부들이나 선원들의 안전을 살피기 위한 행동이며, 나아가 어부들이나 선원들이 바다에서 안전한 고기잡이를 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모티프는 ‘풍요를 상징하는 고대 여신적 면모’를 그대로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화소인 것이다.
수심 재기 모티프는 같은 해양 거인형 여신인 「설문대할망 설화」에도 등장한다. 설문대할망은 제주도 안에 있는 깊은 물들이 자기의 키보다 깊은 곳이 있는지를 시험해 보려 하면서, 제주시 용담동에 있는 용소가 깊다는 말을 듣고 들어가서 보니 물이 발등에 닿았고, 서귀읍 서흥리에 있는 홍리물이 깊다 해서 들어가서 보니 무릎까지 닿았다. 이렇게 물마다 깊이를 시험해 보며 돌아다녔는데 마지막에 한라산에 있는 물장오리에 들어섰다가 그만 그곳에 풍덩 빠져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물장오리가 밑이 터져 한정 없이 깊은 물임을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설문대할망이 물장오리에 빠져 죽었다는 것은 격하된 신격의 비극성과 선문대 할망이 신화에서 설화적 주인공으로 세속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반면에 곰소의 계란여가 깊어 발이 빠지자 계란여를 직접 메우는 개양할미는 여전히 창조신적인 능력을 간직하고 있는 거인형 여신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개양할미의 신성성은 격하되지 않고 지속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전승되는 이야기 유형에 따라 개양할미 이야기에 ‘옷 만들기’ 모티프가 있는데, 이 역시 상징적인 의미를 띤다. 부안 변산 일대에서는 개양할미가 여덟 명의 딸을 데리고 바느질을 하고 있는 이야기가 채록되는데, 이는 거인형 여신 설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화소이기도 하다. 옷을 만드는 거대 여신 할머니는 지리산의 「마고할미 설화」에도 나타난다. 지리산 마고할미는 나무에서 실을 뽑아 남편 반야에게 줄 옷을 만들지만, 반야가 마고할미 앞을 그냥 지나쳐 가는 바람에 화가 나서 찢어버린다.
한편 충청남도 해안 지방에 나타나는 「갱구할미 설화」에서 거대한 몸집의 갱구할미도 옷 입기를 소원하여 1년 치 삼남(三南)의 공포(貢布)로 옷을 해 입고 즐거워한다. 또한 제주도의 설문대할망도 몸집이 너무 커서 옷을 입을 수가 없는데, 속옷을 한 벌만 만들어 주면 육지까지 다리를 놓아주기로 제주도 사람들과 약속한다. 할망의 속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명주 100통이 필요한데 99통밖에 모으지 못해 설문대할망의 옷 만들기는 실패하고, 그에 따라 할망도 육지까지 다리를 놓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렇게 거인형 여신 설화에서는 ‘옷’ 모티프가 등장하는데, 이는 ‘거대하고 큰’ 개양할미를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거인형 신과 관련이 있다. 아울러 옷을 만드는 행위를 통해 신의 모습을 여인으로 표현하고자 한 ‘여신’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개양할미의 거인적 용모나 흰옷 입은 모습 때문에 백의관음(白衣觀音)과 비교되기도 한다.
이상으로 개양할미 이야기에 나타나는 ‘나막신’, ‘수심 재기’, ‘옷 만들기’ 모티프를 살펴보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거인형 창조 여신의 위상과 능력을 보여주는 화소인 동시에 부안 지역이라는 지형적 특성이 드러내는 화소로 작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변산을 지킨 거인 여신, 水聖이 되다; 개양할미 설화의 의미]
창조 여신적 특성으로 살펴볼 때, 개양할미는 천지 분리나 천체 현상을 조정하는 1단계 창조 행위를 하는 여신이 아니고, 어느 특정 지역 형성에 관여하는 2단계 창조 여신이라고 할 수 있다. 개양할미는 곰소의 계란여를 비롯하여 칠산 바다 깊은 곳을 메우고 다니는 등 서해 바다 지형 형성에 관여하고 있는 창조 여신인 것이다. 또한 개양할미는 거인의 특성을 지니며, 아들딸을 두는 등 마고 계열의 창조 여신 이야기와 일맥상통한다. 제주도 설문대할망이 아들 오백 명을 두었고, 지리산 마고할미는 여덟 명의 딸을 두었으며, 개양할미 역시 여덟 명의 딸을 낳았다. 그런데 설문대할망은 아들들의 죽이 되고, 결과적으로는 아들들도 죽음에 이른다. 반면 지리산 마고할미는 딸 여덟 명을 팔도로 보내 무당을 만들고 자신은 지리산 산신으로 좌정하며, 개양할미는 딸 여덟 명을 각각 칠산 바다의 중요한 당집으로 보내 서해 바다를 수호케 하고 자신은 막내딸만 데리고 수성당에 머물며 서해 바다를 총괄한다.
이러한 한국의 거인형 창조 여신 설화는 고대 국가 이후, 남성적 문화가 지배적인 사회로 들어서면서 그 신성성이 변성되는 것으로 보인다. 같은 거인형 창조 여신 이야기 중에서도 같은 해신 계열인 제주도의 「설문대할망 설화」와 부안의 「수성당의 개양할미」 이야기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친연성이 있어 비교 대상이 되기도 한다.
제주도 「설문대할망 설화」에서 설문대할망이 발을 헛디뎌서 물장오리에 빠져 익사한다는 이야기나 큰 옷을 끝내 입지 못한다는 것, 오백 아들들의 죽이 되는 내용 등을 통해 볼 때 설문대할망은 더 이상 창조 여신의 면모를 지니고 있지 못한다. 이들 화소는 창조신인 설문대할망의 세속화와 인간화, 즉 창조신적 지위의 추락을 알리는 화소라고 할 수 있다. 창조신이 ‘실수’를 한다는 것은 신화적 단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실수는 인간 존재의 한계를 드러내는 표지로서 설문대할망이 전설의 주인공으로 전락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개양할미는 설문대할망이 신격이 격하되고 세속화되는 과정을 겪는 것과는 다르게, 칠산 바다 여기저기와 곰소의 계란여를 메우는 등 창조신적인 능력을 드러낸다. 개양할미는 선원들의 뱃길 안전과 고기잡이를 돕는 칠산 바다의 해신, 어로 신앙의 대상으로 풍요를 상징하는 고대의 여성신적 면모가 살아 있다. 또한 개양할미는 수성당 당신으로 좌정하여 부안 앞바다를 비롯한 칠산 바다를 다스리며 신성성을 유지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개양할미의 신성성은 현재까지 변산 지역 어부들의 뱃길 안전과 풍어를 돕는 상징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매년 정월에 수성당에 올리는 제의를 기반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개양할미의 신성성에 대한 부안 변산 민중의 욕구와 기대가 다른 창조 여신들의 세속화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형태로 계승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개양할미의 창조신적 능력은 ‘물의 성인’, 즉 ‘수성(水聖)’으로 이어져 부안 지역의 해양 문화 속에서 보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