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13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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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竹山-白山-本格的-東學農民革命-始作-白山大會 |
영어공식명칭 | Baeksan Convention|Jooksan When They Sit down, and Baeksan When They Stand up! The People’s Rally of Baeksan Which Marked the Full-fledged Start of Donghak Peasants Revolution |
이칭/별칭 | 백산 기포,백산 봉기,백산 대회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박대길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94년 - 1894년 5월 1일[음력 3월 26일] 고부 봉기와 무장 기포를 거쳐 백산에 집결한 호남 일대 동학교도와 농민이 혁명군을 조직하고, 혁명의 대의[격문]와 강령[사대 명의], 그리고 혁명군이 지켜야 할 12개조 군율을 선포하며 본격적으로 혁명을 시작한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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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장소 | 백산 대회 -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산8-1 |
[정의]
1894년 5월 1일[음력 3월 26일]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에 있는 백산에서 개최한 동학 농민 혁명 출정식.
[개설]
고부(古阜)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과 수탈을 계기로 고부에서 봉기한 민중은 무장(茂長)에서 전열을 정비한 뒤, 호남 각지에서 온 민중이 백산에 모여 혁명군으로서의 조직을 갖추었다. 또한 혁명의 대의를 밝힌 격문(檄文), 강령에 해당하는 사대 명의(四大名義), 그리고 혁명군이 지켜야 할 12개조의 군율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이로써 동학 농민 혁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고, 혁명군이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 황토현 전투(黃土峴戰鬪)의 출발지가 되었다.
[동학의 창도와 동학 농민 혁명의 배경]
19세기 중반, 서구 열강이 동양을 압박하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물결이 조선에 휘몰아쳤다. 특히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던 중국[청]이 영국과 프랑스 등 서양 세력에게 굴복함으로써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라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위기의식이 증대하였다. 이와 함께 조선 사회는 60여 년에 걸쳐 특정 가문과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勢道政治)의 폐해로 인해 탐관오리의 부정부패가 일상화되었고, 오갈 데 없는 민중은 희망마저 잃고 말았다.
경상도 경주(慶州)의 유력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재혼한 여자[재가녀(再嫁女)]의 자식이라는 신분으로 인해 불운을 겪어야 했던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1824~1864]는 1860년 음력 4월 5일, 경주 용담정(龍潭亭)에서 모든 인간은 하느님을 마음에 모신다는 시천주(侍天主), 평등사상과 새 세상을 염원하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의 동학을 창도하였다. 특히 일본과 서양의 침략에 맞서는 척왜양(斥倭洋) 민족 자주,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서로 돕는 나눔의 공동체를 실현하는 유무상자(有無相資), 질병의 치료와 길흉에 대한 예언 등을 내용으로 하는 동학은 그 당시 핍박 받던 민중의 의식과 염원을 수용하여 체계화시킨 것으로 민중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순식간에 전파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인간 평등을 내세워 신분제를 부정하고, 민간에 깊숙이 전파되어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며 급속히 확산하는 동학을 차단하며 탄압하였다. 그리고 교조 최제우를 체포한 뒤 “세상 사람을 속여 미혹시키고 어지럽힌다.”라는 혹세무민(惑世誣民)과 “거짓된 도로 정도를 어지럽힌다.”라는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목으로 1864년(고종 1) 3월, 대구 관덕정(觀德亭)에서 처형하였다. 이와 함께 동학 금지령을 내렸는데, 이를 빙자한 관원과 토호 세력이 동학교도의 생명은 물론 재산까지 수탈하며 탄압하였다.
최제우를 이어 동학 교단을 맡은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1827~1898]은 최제우가 남긴 말과 글을 모아 경전으로 간행하고, 동학의 제의(祭儀)와 조직을 체계적으로 정비하여 교단의 기틀을 다졌다. 그 결과 1880년대 중반에 이르러 동학은 급격한 성장을 이루는데, 그것은 민중의 염원을 수용한 교단의 조직화가 성과를 거둔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동학 교단에서는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사면과 복권은 물론 동학의 공인과 탄압 금지를 요구하는 교조 신원 운동(敎祖伸寃運動)을 전개하였다. 1892년 공주(公州)와 삼례(參禮), 1893년 광화문 복합 상소(伏閤上疏) 및 보은(報恩)과 금구(金溝)에서 집회를 개최하였다. 특히 보은과 금구 집회에서는 민권 의식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척왜양 창의(斥倭梁倡義)가 전면에 부각되었는데, 이것은 민중의 염원을 수용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훗날 동학 농민 혁명을 이끄는 주요 인사들이 부상하였다.
전라북도 부안 사람으로 맨 처음 동학에 입도한 인물은 윤상오(尹相五)로 1880년대 초반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포교는 1890년 6월에 김낙철(金洛喆)이 입도한 이후이다. 그 이듬해 교주 해월 최시형이 전라북도 부안을 방문하여 “부안에서 꽃이 피고, 부안에서 결실을 보리라.[개화어부안(開花於扶安) 결실어부안(結實於扶安)]”라는 말을 남겼다. 1892년과 1893년에는 전라북도 부안의 동학도가 수만에 이르렀다.
교조 신원 운동기 전라북도 부안 동학의 움직임은 뚜렷하지 않다. 이 시기 부안 대접주 김낙철은 전라도 동학 책임자로 도도집[都都執]을 맡고 있었다. 다만, 동생 김낙봉(金洛封)과 김영조[김석윤(金錫允)] 등 수백 명이 광화문 복합 상소에 참여하였고, 보은 집회 때에는 김낙철이 김영조 등 수백 명과 함께 참여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상경하는 도중에 전라북도 완주 고산(高山)에서 돌아왔다.
교조 신원 운동을 거치면서 결집한 동학의 혁신 세력 중 고부에 거주하던 전봉준(全琫準)[1855~1895]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수탈을 명분으로 삼아 혁명의 대장정을 구상하며 본격적으로 준비하였다. 바로 ‘사발통문(沙鉢通文) 거사 계획’이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20명이 동그란 원을 그리며 서명한 사발통문에는 “고부성을 격파하고 조병갑의 목을 베어 죽일 것.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군수에게 아부하며 백성을 침탈한 탐리(貪吏)를 엄하게 징벌할 것. 전주 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진격할 것” 등을 담고 있는데, 세 번째와 네 번째 항은 혁명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사발통문 거사 계획은 조병갑의 익산(益山) 군수 발령으로 유보되었다.
[백산의 인문 자연 지리적 환경]
일본이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1914년에 단행한 행정 구역 개편으로 고부군에서 부안군으로 편입되기 전까지 고부 백산은 주변 일대가 모두 넓은 평야로 이루어져 있어 ‘가히 만민이 살만한 땅[가활만민(可活萬民)]’의 길지(吉地)였다. 해발 47.4m의 야트막한 야산이지만 정상에서 주위를 한눈에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동진강(東津江)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고부천(古阜川)이 흐르는 천연의 요새로 삼국 시대부터 산성(山城)으로 기능하였다. 또한 고부군을 중심으로 부안현(扶安縣)·정읍현·김제군·태인현(泰仁縣)으로 통하는 사통팔달의 교통 요지였다. 이런 까닭에 민중은 고부 봉기 전부터 백산을 전략적 요충지로 중시하였다.
[호남창의동맹소 시기의 백산]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고부의 민중은 고부 관아를 점령하며 혁명의 불길을 댕겼다. 이들은 백성의 원성이 자자한 방보세(防洑稅)와 진결세(陳結稅) 수천 석을 확보한 뒤 백산 매안리[현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산내마을]에 쌓아 두고, 농민에게 나누어 주며 민심을 얻는 한편 군량을 확보하였다.
이와 함께 고부 관아와 말목 장터, 그리고 백산을 호남창의소(湖南倡義所)로 삼아 오가며 봉기의 지속과 확산을 모색하였다. 농민군의 일부는 백산에 호남창의소를 운영하고, 전봉준 등 고부 봉기 지도부는 3월에 줄포 세고를 점령해 군량을 확보하고, 사냥꾼에게서 무기를 징발하며 전투에 필요한 장비를 확보하는 등 단계적으로 봉기를 확대하면서 무장으로 이동하여 전열을 정비하였다. 이와 함께 각지에 소식을 전해 백산에 집결할 것을 독려하였다. 4월 25일[음력 3월 20일] 무장을 출발한 민중은 고창과 흥덕, 줄포를 지나 고부를 다시 점령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백산으로 이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를 비롯한 전라도 각지에서 모인 민중은 5월 1일[음력 3월 26일] 백산에서 ‘앉으면 죽산이요, 일어서면 백산이라.’라고 일컫는 백산 대회를 개최하였다.
[앉으면 죽산이요, 일어서면 백산이라.]
백산 대회 는 5월 1일[음력 3월 26일]에 이루어졌다. 한때 ‘봉기’와 ‘기포(起包)’로 부르던 명칭을 ‘대회’로 정하는 공감대를 형성한 것은 백산 대회의 성격을 명확히 하는 것이었다. 즉, 고부 봉기와 무장 기포를 거치면서 혁명의 분위기를 조성한 뒤, 봉기에 동의하는 전라도 일대 참여자들이 백산에 모여 혁명의 대의는 물론 4개 항의 강령과 혁명군이 지켜야 할 군율을 선포함으로써 비로소 혁명군의 위상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백산 대회 를 통해 조직된 지도부는 총대장(總大將) 전봉준, 총관령(總管領) 김개남(金開南)·손화중(孫華仲), 총참모(總參謀) 김덕명(金德明)·오시영(吳時泳), 영솔장(領率將) 최경선(崔景善), 비서 송희옥(宋憙玉)·정백현(鄭佰賢) 등이었다. 이와 함께 혁명의 대의를 밝히는 격문과 사대 명의, 그리고 12개조의 군율을 선포하였다.
격문
우리가 의(義)를 들어 여기에 이르렀음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蒼生)을 도탄(塗炭)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盤石)[반태산(磐泰山)]의 위에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貪虐)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강포(强暴)한 도적(强賊)의 무리를 쫓아 내몰고자 함이라. 양반(兩班)과 부호(富豪)의 앞에서 고통을 받는 민중과 방백(方伯) 수령(守令)의 밑에서 굴욕(屈辱)을 당하는 힘없는 아전[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이라.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돌이키지 못하리라.
갑오 정월 십칠일(甲午 正月 十七日)
호남창의소 재고부백산(湖南倡義所 在古阜白山)
오지영의 『동학사』에만 기록되었다는 점과 날짜가 잘못되었다는 이유로 일부 연구자들이 부정적으로 평가하지만, 백산에서 호남창의소 명의로 발표한 격문은 그 당시 동학 농민군이 지향하는 바를 명확하게 밝힌 것으로 평가받는다. 격문은 혁명군의 의지를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하루하루 사는 것조차 버거운 민중을 구하고, 국가를 안전하고 견고하게 지키겠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를 위해서 안으로는 탐욕스럽고 포학한 관리를 처단하는 개혁과 밖으로는 외세를 몰아내겠다는 민족 자주를 확고히 하였다. 그뿐 아니라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유교적 지배 질서에서 고통을 받는 모든 이들의 동참을 호소하였다. 따라서 백산에 집결하여 조직을 갖춘 혁명군이 각지에 보낸 격문은 ‘혁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음을 선포하는 함축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대 명의
첫째,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생물 역시 함부로 잡아먹지 말라.
둘째,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
셋째,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는다.
넷째, 군사를 몰아 서울로 쳐들어가 권귀(權貴)를 모두 없앤다.
사대 명의는 동학의 생명 존중 사상과 인간 본연의 윤리, 사회 개혁과 반침략 평화주의의 성격을 담고 있다. 더 나아가 국가와 사회, 그리고 백성을 구하고자 하는 동학 농민 혁명의 정당성을 밝히고 있다.
12개조 군율
① 항복한 자는 대접한다.
② 곤궁한 자는 구제한다.
③ 탐학한 자는 추방한다.
④ 순종한 자는 경복한다.
⑤ 도주하는 자는 쫓지 않는다.
⑥ 굶주린 자는 먹인다.
⑦ 간사하고 교활한 자는 그치게 한다.
⑧ 빈한한 자는 진휼한다.
⑨ 불충한 자는 제거한다.
⑩ 거역하는 자는 효유한다.
⑪ 병든 자에게는 약을 준다.
⑫ 불효자는 죽인다.
위의 조항은 우리들이 거행(擧行)하는 근본이다. 만약 명령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지옥(地獄)에 가둘 것이다.
12개조 군율은 사대 명의 중에서 첫째 항목과 둘째 항목을 구체적으로 세분한 것으로, 생명 존중의 인본주의적 요소와 충효의 사회적 윤리를 더욱더 강조하고 있으며, 혁명군이 실천해야 할 덕목이었다.
백산 대회 를 개최하여 혁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음을 알린 전봉준과 손화중은 전라북도 부안으로 이동, 부안읍 모산리 분토동 김씨 재실에 집결한 부안 동학 농민군과 합류한 뒤, 부안 관아를 점령하였다. 부안 관아 점령은 백산 대회에서 혁명군을 조직한 뒤 거둔 최초의 쾌거였다. 또한, 전라북도 부안에서 전열을 재정비한 동학 농민군은 전라 감영에서 파견한 진압군에 맞서기 위해서 황토현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4월 6일 저녁 무렵에 시작하여 4월 7일 새벽에 끝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황토현 전투의 주력군은 백산 대회를 거쳐 부안에서 전열을 정비한 동학 농민군이었다.
[동학 농민 혁명에서 백산 대회의 위상]
백산은 고부 봉기부터 혁명군이 주둔한 전략적 요충지였고, 백산 대회는 사발통문 거사 계획-고부 봉기-무장 기포-백산 대회로 이어지는 동학 농민 혁명 초기 전개 과정의 정점이었다. 이에 따라 오랜 동안 백산 대회를 개최한 3월을 ‘3월 봉기’라 하여 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으로 이해하였다. 그런데, 고부 관아를 점령한 날을 동학 농민 혁명의 시작으로 이해하거나 ‘무장 포고문’이 발표되었다는 무장 기포를 동학 농민 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한때 백산 대회의 실체를 부정하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식민 잔재였다. 조선을 식민지로 강탈한 일본은 저항 정신이 강한 지역을 해체하고 고립하는 행정 구역 개편을 단행하였다. 특히 동학 농민 혁명 정신을 말살하려는 일본의 식민 정책은 교묘하고 악랄하게 진행되었다. 역사와 전통은 물론 규모가 가장 컸던 고부와 태인을 면 단위로 격하시키고, 여러 면에서 뒤떨어졌던 정읍을 중심으로 통폐합시켰다. 마찬가지로 무장과 흥덕을 면 단위로 격하시키며, 규모가 가장 작았던 고창을 중심으로 통폐합시켰다. 그때 동학 농민 혁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상징적 의미가 있는 고부 백산을 부안 백산으로 떼어냈다. 이러한 행정 구역 개편은 지역민의 무관심과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식민 정책은 그대로 잔존하였다. 1968년 정읍 갑오동학혁명기념사업회가 주관한 갑오 동학 혁명 기념 문화제는 백산 대회[음력 3월 26일]에 맞추어 개최하였으나 제4회부터 뚜렷한 이유 없이 황토현 전승일로 변경하였다. 일제 강점기부터 자행된 백산에서의 채석(採石)은 1980년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며 훼손하였고, 1989년 백산 정상부에 ‘동학 혁명 백산 창의비(東學革命白山倡義碑)’를 건립하였으나, 1997년부터 시작한 기념행사는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이 주관하는 면 단위 기념행사였다. 더욱더 아쉬운 것은 2004년 동학 농민 혁명 법정 기념일 제정을 위한 토론회에서 백산 대회의 실체를 부정하고 기념일 후보에서 제외하였다. 그 영향으로 2012년에 교육 방송[EBS]에서 자체 제작한 「역사 채널 그날」에서는 백산 대회를 아예 제외했다. 고부 봉기와 무장 기포, 백산 대회로 연속되는 역사적 사실을 단절시키고, 백산 대회의 실체 불명과 의미 축소로 호도한 것이다.
그러나 ‘호남 일대의 민군이 모여드니, 앉으면 죽산이요, 일어서면 백산이라’라고 상징화된 백산 대회는 고부 봉기와 무장 기포에 참여한 민중을 혁명군으로 조직하고, 혁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음을 선언한 격문, 혁명군이 지향하는 바와 목표를 분명하게 밝힌 사대 명의[강령], 혁명군이 지켜야 할 규율을 명시한 12개조 군율 등을 선포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따라서 백산 대회는 동학 농민 혁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역사적인 날이며, 동학 농민 혁명사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역사적 사실이다.
[동학 혁명 백산 창의 비문(東學革命白山倡義碑文)]
이곳 백산(白山)은 1894년(一八九四年) 동학 혁명군(東學革命軍)의 첫 지휘소(指揮所)가 설치(設置)되고 혁명군(革命軍)이 총집결(總集結)했던 곳이다. 19세기 말(十九世紀末) 안으로는 봉건적(封建的)인 모순(矛盾)이 극도(極度)에 달(達)하고 밖으로는 외세(外勢)의 침략(侵略)이 가중(加重)되고 있을 때 이러한 위기(危機)의 한 가운데 처(處)해 있던 농민(農民)들은 반봉건 반외세 투쟁(反封建反外勢鬪爭)으로 총궐기(總蹶起)하였다. 전봉준(全琫準)·손화중(孫華仲)·김개남(金開南)·김덕명(金德明)이 중심(中心)이 된 동학 혁명 지휘부(東學革命軍指揮部)는 창생(蒼生)을 도탄(塗炭)에서 건지고 국가(國家)를 반석(盤石) 위에 두고자 의기(義旗)를 높이 들었던 것이다. 동학군(東學軍)은 손에 손에 죽창(竹槍)을 들고 이곳 백산(白山)에 모여 들어 ‘앉으면 죽산(竹山)이요, 서면 백산(白山)[좌즉죽산 입즉백산(坐則竹山立則白山)]’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백산(白山)에서 출발(出發)한 동학군(東學軍)은 호남(湖南)을 석권(席捲)하고 전주성(全州城)을 점령(占領)하여 우리나라 근대 민족 운동사(近代民族運動史)에 찬연(燦然)히 빛나는 한 획을 긋기에 이르렀다. 이에 역사적 고장(歷史的 故庄)인 이곳 백산(白山)에 그 기념비(紀念碑)를 세워 후세(後世)에 길이 전(傳)하고자 한다.
1989년 11월 15일(一九八九年 十一月 十五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박영석(國史編纂委員會 委員長 朴永錫) 짓고
이가범(李可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