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13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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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扶安烽燧-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조명일 |
[정의]
고려와 조선 시대 전라북도 부안 지역에 설치되었던 봉수의 분포 양상과 역사적 의미.
[개설]
조선 시대 전라도 황해안[서해안] 지역을 통과하는 봉수는 5봉수로(烽燧路) 중 여수 돌산도에서 서울 남산까지 연결된 5거 루트 직봉과 간봉이 통과하는 곳으로, 모두 14개소의 봉수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봉수는 그 흔적만 남아 있을 정도로 훼손되어 정확한 구조, 형태, 규모 및 관련 시설 등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다만 부안에 위치한 3개의 봉수는 다른 지역에 비해 잔존 상태가 양호하여, 조선 시대 전라북도 지역에 설치된 봉수를 연구하는 데 값진 자료를 제공해 준다. 특히 부안 점방산 봉수[대항리 봉수]는 최근의 시굴 조사로 봉수의 구조 및 규모 등을 파악할 수 있었고, 주변의 시설과 봉수군(烽燧軍)의 생활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서 의미가 크다.
고려 시대 전라북도 지역은 해안뿐 아니라 도서 지역에도 많은 수의 봉수가 배치되었다.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1123년(인종 1) 편찬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의 내용으로 미루어 봉수가 고려 시대부터 체계적으로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큰데, 조선 시대로 들어와 위도진, 고군산진 등 수군 기지에서 해안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되었던 권설 봉수(權設烽燧)로 그 기능이 변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봉수의 개념과 발전 과정]
봉수란 횃불[봉(烽)]과 연기[수(燧)]로써 변방의 긴급한 군사 정보를 중앙에 알리는 군사 통신 제도의 하나이다. 중국에서는 봉수를 올릴 때 이리의 똥을 사용했기 때문에 낭화(狼火), 또는 낭연(狼煙)이라고도 불렀다. 대체적으로 수십 리 간격으로 전망이 좋은 산봉우리에 봉수대를 축조하여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로 중앙에 소식을 전달하였다. 주나라 유왕(幽王)이 애첩 포사(襃姒)의 웃는 얼굴을 보기 위해 거짓 봉화를 올렸다는 일화로 볼 때 중국은 주나라 때 이미 봉수를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에 봉수가 도입되어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제도적으로 확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가락국기(駕洛國記)」에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이 봉화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보이며,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백제 온조왕(溫祚王) 조에 봉현(烽峴)을 비롯하여 봉산(烽山), 봉산성(烽山城) 등 봉수와 관련한 지명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삼국 시대에 이미 봉수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봉수와 관련한 구체적인 기록이 등장한 것은 고려 전기이다. 1123년(인종 1)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에, 송의 사신이 흑산도에 들어서면 매양 야간에는 항로 주변의 산 정상 봉수에서 횃불을 밝혀 순차적으로 왕성까지 인도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봉수제가 잘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1149년(의종 3)에는 서북 병마사 조진약(曺晉若)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봉수의 거화 수, 봉수군의 배치 등을 정하여 봉수가 제도적으로 규정되었다. 이러한 고려 시대의 봉수 제도는 몽골의 침입으로 일시 무너지게 되었으나 여말 선초(麗末鮮初)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1351년(충정왕 3) 다시 복구, 재편되었다.
고려 시대의 봉수제를 이어 받은 조선은 세종(世宗) 대 북방의 4군 6진 설치와 병행하여 야인에 대한 방어책으로서 봉수를 축조하였고, 1437년(세종 19)에는 각 도 연변의 경계 지역 봉수에 연대 시설을 설치하여 봉수의 방어력을 높였다. 한편, 1447년(세종 29)에는 봉수의 거화 수를 5거로 규정하고, 봉수의 시설, 봉수군의 상벌 제도 등을 『경국대전(經國大典)』 봉수 조에 규정하여 제도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봉수제는 봉수군의 고역과 근무 태만, 시설의 미비, 보급의 부족 등으로 인해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乙卯倭變), 1583년(선조 16) 이탕개(尼蕩介)의 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등이 일어났어도 거화하지 않거나 봉화가 도중에 끊기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여 파발제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이 또한 경비 문제나 전달 속도 등의 문제점을 드러내어 숙종(肅宗) 이후 봉수제는 다시 시행되었고, 기존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봉수 변통론이 제기되어 연대에 화포를 설치하거나 파발제와 병행하여 실시하였다.
[봉수의 종류]
봉수는 위치나 임무에 따라 경봉수(京烽燧), 연변 봉수(沿邊烽燧), 내지 봉수(內地烽燧)로 나눌 수 있다. 경봉수는 수도 한성에 있던 봉수로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되던 중앙 봉수이다. 현재 서울 목멱산[남산]에 있는 봉수로서 1423년(세종 5) 봉화 5개소를 설치하였다. 제1봉화는 함길도·강원도에서 오는 봉화를 받으며, 제2봉은 경상도 봉화를 수신하였으며, 제3봉과 제4봉은 평안도·황해도 봉화를 수신하였고, 제5봉은 충청도·전라도의 봉화를 수신하였다.
연변 봉수는 두만강-압록강의 강가나 황해안·남해안 및 동해안을 중심으로 해안가에 주로 연대를 축조하여 척후의 구실을 하는 봉수이다. 내지 봉수는 내륙에 위치한 봉수로서 복리 봉수(腹裏烽燧)라고도 하였다. 내지 봉수는 연변 봉수에 비해 위험도가 비교적 낮으므로 연대를 쌓지 않고 산 정상 또는 중턱에 장방형 혹은 원형이나 타원형의 축대를 쌓은 다음 그 위에 연조를 쌓고 봉수대 주변에 담장을 쌓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밖에도 권설 봉수(權設烽燧)가 있는데, 이는 본읍(本邑) 외에 군사적으로 중요하였던 본진(本鎭), 행영(行營), 수영(水營)에서 주변의 정보를 신속히 획득하기 위하여 자체적으로 설치, 운영하던 봉수를 말한다.
[전라북도 황해안 지역에 남아 있는 봉수의 현황과 특징]
전라북도 황해안 지역에는 연안 13개소, 도서 7개소 등 모두 20개소의 봉수가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전라북도 황해 연안의 13개소 봉수는 수량이나 명칭 등에서 일부 차이를 보이나, 조선 시대 문헌 기록인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등에 기록된 조선 시대 5봉수로 5거 루트[여수 돌산도~한성]에 해당한다. 이 봉수들 중 김제 길곶, 군산 사자암, 군산 점방산 봉수 등은 15세기 문헌에는 확인되나 18세기 이후에 제작된 고지도와 문헌 등에는 등장하지 않는데, 이는 임진왜란 이후 봉수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폐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변 봉수의 상호 대응 거리는 대체로 12~16㎞로 타 지역의 연안 봉수 및 내지 봉수보다는 대응 거리가 짧은 것이 특징이다. 이는 황해안의 해안선이 매우 복잡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봉수의 입지는 주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보다는 높이가 낮으면서 시계가 양호한 산 정상부를 선택하였는데, 특히 해안선에서 바다 쪽으로 돌출된 지형이나 포구와 인접한 산봉우리를 택해 봉수대를 축조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변방의 급보를 중앙에 전하는 봉수의 주된 기능과 함께, 해안으로 드나들던 선박의 감시와 안전한 항해를 돕는 등대의 기능을 병행하였음을 의미한다. 현재 대부분의 연안 봉수는 허물어져 본래의 모습을 찾기 어려운 실정이며, 부안의 월고리 봉수와 계화도 봉수는 연대(煙臺)에 대한 복원이 이루어지기는 하였으나, 학술적 고증을 거치지 않고 임의적인 복원이 이루어져 진정성에 문제가 있다. 반면에 최근 전라북도 기념물 제140호로 지정된 부안 점방산 봉수[대항리 봉수]를 비롯하여 김제 길곶 봉수, 군산 오성산[도진] 봉수는 훼손이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기초부가 잘 남아 있기 때문에 향후 철저한 학술적 고증을 거쳐 정비·복원이 이루어진다면 관광 자원으로서 활용도가 높을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 시대 연변 봉수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도서 지역 봉수는 군산 어청도 봉수를 제외하면 조선 시대는 물론, 이 이전의 문헌 기록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어청도 봉수는 17세기에 쓰인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을 그대로 옮겨 적은 『증보문헌비고』에 외안도, 녹도, 원산도 봉수와 함께 충청 수영의 본거지였던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의 망해정 봉수로 신호를 전달하던 기능을 담당하였다고 나와 있다. 또한 19세기 말에 쓰인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어청도 봉수가 충청 수영과 관련된 권설 봉수[수군진, 수영 등에서 임시로 운영한 봉수를 말함]로 기록되어 있다. 도서 지역에 분포된 봉수는 대지가 매우 협소하여 연변 봉수처럼 5개의 연조(煙竈)[불을 직접 피우는 시설]를 배치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그 주변에서 고려 시대 이전의 유물이 수습되는 것으로 보아 조선 시대 이전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1123년 서긍이 편찬한 『선화봉사고려도경』으로, 여기에는 서긍 일행이 이용했던 바닷길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서긍 일행이 흑산도에 다다랐을 때 고려의 개경까지 불을 피워 뱃길을 안내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실제로 이 항해 루트상에 있는 섬들에는 봉수대가 존재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한 황해 각지에서 발견되는 고려 시대 침몰선의 위치로 미루어, 고려 시대 조운로도 서긍 항로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고려 시대 선박의 항해에서 봉수는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안 점방산 봉수[대항리 봉수] 발굴 조사를 통해 알게 된 조선 시대 연변 봉수의 구조]
2019년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에 있는 부안 점방산 봉수[대항리 봉수]에 대한 시굴 조사를 통해 전라북도 지역에 분포된 조선 시대 연변 봉수의 구조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 시대 연변 봉수는 1447년(세종 29)에 규정된 ‘연변 연대 조축지식(沿邊煙臺造築之式)’에 그 구조와 축조 기법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이를 살펴보면 연대의 규모는 영조척(營造尺)을 사용하여 높이 25척, 둘레 70척으로 하며, 연대 밑의 사면은 30척으로 하되 그 바깥에는 깊이와 넓이 각각 10척의 참호를 빙 둘러 파고 참호 바깥에도 뾰족하게 다듬은 길이 3척의 나무말뚝을 넓이 10척의 규모로 설치하였다. 그리고 연대 위에는 가옥을 지어 무기와 물과 불을 담는 그릇, 각성(角聲)이나 화포 등의 비품을 간수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실제로 봉수의 발굴 조사 사례를 보면, 구조와 형태, 연조의 배치 양상이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이 규정이 봉수를 축조하는 데 하나의 기준이 되었을 뿐, 모든 봉수의 축조에 동일하게 적용되지는 않았음을 의미한다.
부안 점방산 봉수[대항리 봉수] 역시 자연의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연대와 방호벽을 축조하고, 그 내부에 창고와 연조 시설(煙竈施設)을 배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연대는 동서 길이 30m, 남북 길이 33m 내외의 대지 위에 축조되었다. 평면 형태는 원형이며, 직경은 7.8m 내외이다. 상부가 훼손되어 정확하지는 않지만 2~3단으로 쌓았고, 가장 위쪽에 굴뚝부가 마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대의 서북쪽에서 확인된 연조는 직경 5.5m, 높이 1.5m의 석축이며, 상부는 함몰되어 있다. 연대와 연조가 시설된 석축단의 서남쪽에는 봉수의 비치 물목을 저장했던 창고 시설이 있었는데, 전체적인 형태는 장방형이며, 폭 2m 내외의 석축 담장을 둘렀다.
[위도 봉수, 고려 시대 바닷길을 안내하다]
1123년 송나라에서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된 서긍은 자신의 일정 및 고려의 문물, 실정 등을 『선화봉사고려도경』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특히 서긍이 흑산도에 다다랐을 때, 흑산도에서부터 왕성[개경]까지 봉화를 피워 뱃길을 안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배가 항해하는 데에 봉수가 매우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선화봉사고려도경』에 기록된 서긍의 항로를 살펴보면, 중국 명주를 출발하여 15일 만에 협계산에 도착한 후, 흑산-월서-난산도-백의도-궤섬-춘초섬-빈랑초-보살섬-죽도-고섬섬(苦苫苫)-군산도-횡서 등의 호남 황해를 따라 북상하여 충청남도 태안 앞바다에 있는 마도 해역[지금의 신진도]으로 진입한 것이 확인된다. 서긍 일행이 전라남도 해안을 지나 처음으로 정박한 곳은 고섬섬이다. 고섬섬은 부안군의 서쪽 해상에 있는 위도로 추정되는데, 『선화봉사고려도경』에는 고섬섬에 대해 그 형상이 마치 고슴도치와 닮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도(蝟島)의 ‘위(蝟)’ 자는 고슴도치를 뜻하는 것으로 고섬섬이 위도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서긍 일행이 고섬섬을 지나 정박한 곳이 군산도[현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의 선유도]임을 감안하면 이는 더 확실해진다.
위도는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에서 서쪽으로 15㎞가량 떨어진 해상에 자리하는데 그 북쪽에 식도가 인접하며, 서쪽으로 13㎞가량 떨어진 곳에는 상왕등도와 하왕등도가 있다. 위도의 중심에 우뚝 솟아 있는 산이 도제봉[166.3m]인데 그 정상에 봉수가 있었다고 전한다. 현재 등산로가 개설되어 본래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 유지만이 남아 있으며, 주변에 봉수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석재들이 산재한다. 위도의 서쪽에 위치한 하왕등도의 주봉에도 봉수가 있다.
2009년 군산대학교 박물관에서 위도를 대상으로 학술 지표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위도 곳곳에 패총[조개더미]을 비롯한 삼국 시대 고분군, 다수의 유물 산포지가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유물 산포지에서 수습되는 고려 시대 청자 편 중에는 상감 청자를 비롯한 최상급 청자가 섞여 있어 주목된다. 이는 고려 시대 위도가 해상 교역의 중심지로서, 전라남도 강진과 더불어 우리나라 청자 생산의 중심지 중 한 곳인 부안 지역에서 생산된 청자를 수도 개경으로 실어 나르던 연안 항로의 시작점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 위도 봉수는 서쪽의 하왕등도 봉수, 동쪽의 월고리 봉수와 함께 청자 운반선을 비롯한 무역선들의 뱃길을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서긍 역시 당시 청자 운반선의 항해로를 따라 북쪽으로 항해하여 개경까지 들어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시대 이전에도 이 항로의 중요성은 적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월고리 봉수의 북쪽 맞은 산자락에 자리한 부안 죽막동 유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부안 죽막동 유적은 1991년 국립전주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4세기 이후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는 해양 제사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특히 출토된 유물을 보면 백제 토기를 중심으로 가야, 신라, 일본, 중국제 유물이 다수 포함되어 삼국 시대 이 지역이 국제 무역의 최대 거점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조선이 들어선 뒤에도 부안 격포와 위도 사이를 잇는 뱃길은 성행하였다. 현재 위도면 치도리에는 청나라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문인석 한 쌍이 남아 있다. 구전에 따르면, “위도와 격포 사이 작은 무인도인 임수도는 본래 인수도(人受島)라 불렸는데, 청나라 상인들이 오갈 때 인수도 앞바다에서 배가 자주 침몰하자 이를 막기 위해 사람을 바다에 빠뜨려 용왕님께 제를 올렸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을 빠뜨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고 이후부터는 사람 형상의 돌을 만들어 빠뜨렸다.”라고 전해진다. 이 구전에 등장하는 임수도는 위도와 격포를 잇는 항로의 가운데에 있다. 지금도 위도와 격포를 잇는 여객선은 이 항로를 이용하여 운행한다.
이처럼 고려와 조선 시대 뱃길을 안내하던 위도 봉수는 1683년(숙종 9) 위도진이 설치되면서 그 기능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16세기 이후 황당선(荒唐船)과 해랑선(海狼船)이라 불리는 중국 선박이 황해 연안에 침입하여 불법 조업 및 해적질을 일삼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황해 도서 지역에 군산진[선유도, 1624년], 위도진[1683년], 임자진[전라남도 신안군 임자도, 1711년], 흑산진[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도, 1678년]을 설치하여 왜구 및 해적을 퇴치하기 위한 적극적인 방비책을 마련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고려 시대 황해 도서 지역에 설치되었던 봉수들은 수군진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권설 봉수로 재편되어 황해 방어의 핵심 기능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봉수의 활용 방안]
봉수는 그 특성상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유적이고, 대부분 주변 조망권이 뛰어난 산 정상부에 있기 때문에 어떤 유적보다 관광 자원으로서 활용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여러 지방 자치 단체에서 주관하는 지역 문화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봉수 점화 행사와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기원식에 봉수를 점화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유적의 진정성을 밝히기 위한 학술적 고증은 무시된 채 무분별한 복원이 이루어지는 상황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봉수는 군사 통신 시설이지 제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철저한 학술적 고증을 통한 정비 복원이 선행되어야 하며, 지역과 지역을 연계한 봉수 재현 행사 등을 기획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부안을 비롯한 새만금 권역의 봉수는 고려 시대부터 이어진 바닷길을 따라 분포하였기 때문에 부안, 김제, 군산이 연계하여 봉수로를 재현하고, 이를 통한 뱃길 유람 코스 등을 개발하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