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1307 |
---|---|
한자 | 茁浦灣-陶瓷文化- |
영어공식명칭 | Blossom the ceramic culture in Julpo Bay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
시대 | 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한정화 |
관련 지역 | 부안 유천리 요지 -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 139-1 |
---|---|
관련 지역 | 부안 진서리 요지 -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 1013 |
관련 지역 | 우동리 요지 -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동길 47-26[우동리 산25-1] |
[정의]
고려 시대~조선 시대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만 연안을 중심으로 번영하였던 도자 문화 이야기.
[개설]
줄포만(茁浦灣)은 부안군 진서면·줄포면·보안면과 고창군 흥덕면·부안면·심원면에 ‘⊂’ 형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서쪽으로 열려 있다. 부안 지역 일대의 청자 요지(窯址)는 진서면 진서리와 보안면 유천리에 대단위로 군집해 있으며, 이외에 우동리와 신복리에도 일부 청자 요지가 분포한다. 지리적으로 모두 줄포만 연안에 자리하고 있다. 같은 줄포만 연안에 자리하고 있는 고창 지역의 아산면 용계리와 반암리에도 청자 요지와 건물터가 대단위로 형성되어 있으며, 이 두 지역의 고려청자(高麗靑瓷) 요지들은 지리적 환경, 제작 시기 측면에서 별개의 것이라기보다는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특히 제작 시기에 있어서 선후 관계를 가지되 단절되지 않고 연속선상에 있는 점이 주목된다.
즉 고려 초인 10세기 후반~11세기에 고창의 아사면 용계리와 반암리에서 청자가 제작된 이후, 조질 청자와 후해무리굽 완 형식의 청자가 줄포만 연안의 고창 부안면 선운리와 부안 보안면 우동리, 진서면 진서리 일대에서 제작되다가, 12세기~13세기에 부안 진서리와 유천리 요지에서 대단위로 청자가 제작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 글에서는 부안 줄포만 연안에서 고려청자 요업(窯業)이 대단위로 형성될 수 있었던 지리 환경적 요인과 요지의 조사 현황, 출토 유물의 종류와 특징, 도자사적 의의를 살펴봄으로써 이곳에서 꽃피운 고려청자 문화를 이해하고자 한다.
[줄포만 일대에 형성된 부안 고려청자 문화]
줄포만을 중심으로 한 부안 지역에 분포하는 고려청자 요지는 보안면의 유천리와 우동리, 진서면 진서리에 분포하며, 이 중에서 부안 유천리 요지(扶安柳川里窯址)와 부안 진서리 요지(扶安鎭西里窯址)는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우동리 요지(牛洞里窯址)의 경우 고려 시대~조선 시대 청자와 분청사기(粉靑沙器), 백자까지 여러 시기를 아우르는 가마 유적이 존재하지만 사적으로 지정되지 않았으며, 정확한 규모나 위치 등이 정밀하게 조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사적으로 지정된 부안 유천리 요지와 부안 진서리 요지를 중심으로 설명하겠다.
줄포만에 연접한 부안 지역의 고려청자 요지는 보안면의 유천리 요지와 진서면의 진서리 요지로 2개 면에 걸쳐 분포하며, 면적은 부안 유천리 요지가 21만 4125㎡, 부안 진서리 요지가 18만 896㎡로 단일 유적으로는 방대한 규모이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초부터 고려 말까지 청자를 제작하였던 요지가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 폭넓게 분포하고 있으며, 가마의 운영 시기와 품질, 입지 조건, 규모 등에서 지역별로 차이가 있다. 그중에서 부안 지역의 고려청자 요지에서는 청자가 가장 아름다웠던 12세기 후반~13세기를 중심으로 대량 생산하였다.
부안 지역에서 고려청자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던 까닭은 품질 좋은 고령토와 국가의 재목창이었던 변산의 풍부한 땔감, 서해 조운로를 통한 체계적인 운송 등의 지리 환경적 조건이 잘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최고의 청자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인간의 기술적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는데, 그동안 부안에서 발굴 조사된 13기의 청자 가마 유적을 통하여 불턱 구조의 변화, 초벌 전용 칸의 등장, 요전부에 나뭇재를 모아 두기 위한 감실[유약 재료인 소나무재를 모아 두기 위한 작은 방] 모양의 재칸 시설 등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안 지역 가마 구조의 변화는 12세기 녹색을 띠는 불투명한 청자에서 13세기 최고의 비색 상감 청자(象嵌靑瓷)를 완성해 내는 데 기술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려청자 전성기를 풍미하였던 부안 지역의 요업이 쇠퇴하게 된 원인을 문헌 자료인 『고려사(高麗史)』에서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그 이유는 13세기 후반 중국 원나라가 일본 정벌을 위해 900척에 달하는 대규모 선박 제조를 고려에 요구하였으며, 선박을 제작한 조선소가 부안 고려청자 요지와 근접한 진서면 진서리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박 제작에 많은 양의 목재와 인력이 투입되면서 부안 지역 청자 요업의 쇠퇴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대량으로 청자를 제작할 수 있었던 풍부한 목재와 운송에 편리한 해안에 위치한 지리 환경적 요건이, 역사적 사건에 의해 한순간에 요업의 쇠락을 가져온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는 점은 부안 고려청자 요지만이 가지는 특수한 상황으로 여겨진다.
부안군은 서해안과 연접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하여 중국과 일본 등지로 진출할 수 있는 해상 교통의 관문일 뿐만 아니라, 고려 13조창의 하나인 안흥창(安興倉)이 있었던 곳이다. 즉 물산이 풍부하였던 부안 지역은 경제 문화적으로 중요한 거점이었다. 이와 같은 지리적 여건을 바탕으로 진서면 진서리와 보안면 유천리 일원에서는 일반인이 사용하는 무늬 없는 청자에서부터 고려 황실용 최고급 상감 청자까지 다종다양(多種多樣)한 청자가 대량 생산되었다. 이렇게 생산된 청자는 바닷길을 통해 고려 수도 개경(開京)을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 등지로 유통되었는데, 이는 국내외 유적에서 발견되는 부안산 고려청자 출토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세상에 드러난 부안 고려청자 유적]
사적 제69호인 부안 유천리 요지의 조사 연혁을 살펴보면 유천리 요지는 일제 강점기인 1929년 일본인 노모리켄[野守健]에 의해 조사되어 최초로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1993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실시한 정밀 지표 조사에서 약 37개소의 청자 요지를 확인하였고, 이를 지형에 따라 7개 구역으로 범위를 구분하였다. 이 중에서 1구역·2구역·4구역·5구역은 현재 논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지표 조사만 이루어진 상태이다. 3구역·6구역·7구역은 1960년대부터 2020년 현재까지 총 8기의 가마가 발굴 조사되었다.
최초의 문화재 조사는 1966년 국립 중앙 박물관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3구역 12호 일대에서 유물 퇴적구 일부가 발굴되었다. 1997년~1998년에는 원광대학교 박물관이 부안 청자 박물관 건립> 및 요지의 정비를 위하여 조사하였는데, 7구역에서 5기의 가마와 유물 퇴적구가 발굴되었다. 2009년 5월 25일~2009년 7월 1일에는 대한문화유산연구원이 유천리 7구역 5호 가마 보호각 설치를 위해 재발굴 및 강화 처리 등을 실시하였다. 2015년 12월 1일~2018년 8월 7일에는 유적의 효율적인 보존 관리와 활용 방안을 모색하고자 전북문화재연구원이 유천리 3구역 12호 청자 요지 일대에 대한 발굴 조사를 세 차례에 걸쳐 실시하였으며, 1기의 가마와 4기의 고려 시대 건물터, 유물 퇴적구 등이 조사되었다.
2018년 12월 12일~2019년 6월 27일에는 전북문화재연구원이 유천리 6구역을 시굴 및 발굴 조사하였으며, 청자 가마 2기와 유물 퇴적구 등을 확인하였다. 문화재 조사를 통해 밝혀진 부안 유천리 요지는 고려 시대인 12세기 후반~14세기 전반경에 최고급의 비색 상감 청자를 비롯하여 다량의 청자를 만들었던 곳으로, 전라남도 강진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청자 요지로 손꼽히고 있다. 특히 3구역은 부안 고려청자 요지 중 핵심을 이루는 곳으로, 12호 일대에서 고급 청자와 가마 1기, 고려 시대 건물터 등이 조사되어 부안 고려청자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이와 함께 당시 청자를 굽던 진흙 가마의 구체적인 구조[아궁이, 불턱, 번조실, 굴뚝으로 구성된 반지하식 등요]와 크기를 파악할 수 있었으며, 초벌 칸과 감실 등을 활용하여 효율성 있게 요업을 하였던 흔적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적 제70호인 부안 진서리 요지의 조사 연혁을 살펴보면 진서리 요지 역시 유천리 요지와 마찬가지로 일제 강점기인 1929년 일본인 노모리켄에 의해 조사되어 최초로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1993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실시한 정밀 지표 조사에서 약 40개소의 청자 요지를 확인하였고, 이를 지형에 따라 6개 구역으로 범위를 구분하였다. 이 중에서 1구역·2구역은 현재 논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3구역·4구역·5구역·6구역은 민가와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부안 진서리 요지는 1990년대부터 2020년 현재까지 총 5기의 가마가 시·발굴 조사되었다. 최초의 조사는 1990년 변산반도 우회 도로 확포장(擴鋪裝) 공사 계획의 일환으로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때 진서리 5구역 18호 청자 요지가 발굴되었고, 1기의 가마와 유물 퇴적구가 확인되었다. 1993년에는 곰소국민학교[현 곰소초등학교] 뒤쪽을 관통하는 우회 도로 개설의 가능성을 판단하고자 유구의 부존 여부 확인을 위해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 진서리 5구역 20호 청자 요지 일대를 시굴하였으며, 3기의 가마와 유물 퇴적구가 확인되었다.
2003년에는 연동 저수지 제방 확장 공사를 위해 전북문화재연구원이 2구역 7호 청자 요지 일대를 시굴하였는데, 조사 결과 가마는 확인할 수 없었으며 소량의 청자와 흑유 자기를 수습하였다. 2019년에는 유적 훼손으로 인한 긴급 조사로서 전주문화유산연구원이 진서리 1구역 34호 청자 요지 일대를 발굴 조사하였는데, 1기의 가마와 유물 퇴적구에서 청자와 요(窯) 도구 등이 소량 수습되었다. 부안 진서리 요지는 1구역·2구역·5구역에 대한 문화재 발굴 조사를 통해 11세기 후반~13세기에 이르는 다양한 종류의 고려청자를 제작한 곳으로 밝혀졌다.
[부안 지역 고려청자가 지닌 가치]
부안 진서리 요지는 지표 조사와 시·발굴 조사를 통해 11세기 후반~13세기경에 다량의 청자를 생산하였던 곳으로 확인되었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청자는 제작 시기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구역별 구분 없이 공존하는 양상을 띤다. 진서리 요지 중 비교적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청자는 11세기 후반~12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이 시기 유물이 출토되는 가마는 2구역 7호와 5구역 17호· 23호·24호 등이 있다. 이른 시기의 유물은 무문의 조질 청자 발, 완, 항, 반구병, 흑유 자기 등이 있으며, 이외에 음각 기법과 철화 기법으로 화문(花紋)과 당초문(唐草紋)을 간략히 장식한 예도 소량 확인된다. 부안 진서리 요지 중 후행하는 시기에 해당하는 청자는 12세기 중엽~13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이 시기의 유물이 출토되는 가마는 1구역 1호·34호, 2구역 8호, 5구역 18호·20호·26호·28호·30호 등이 있다. 이곳에서는 무문, 음각, 철백화, 압출 양각, 상감 기법으로 모란과 모란 당초, 파어, 포도당초, 연판, 앵무, 연화, 국화, 번개, 물가 풍경 등의 무늬를 장식한 청자 발과 완, 잔, 접시, 뚜껑, 병, 매병(梅甁), 잔 받침, 퇴수기, 마상배(馬上杯), 향로, 연봉형 못가리개, 유병 등이 출토되어 앞선 시기 가마군에 비해 기종과 무늬 넣는 기법이 다양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안 유천리 요지는 지표 조사와 발굴 조사를 통해 12세기 후반~14세기 전반경에 최고급의 비색 상감 청자를 비롯하여 다량의 일상 기명 청자를 만들었던 곳으로 확인되었으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청자 요지로 손꼽힌다. 부안 유천리 요지에서는 무문을 비롯하여 음각, 압출 양각, 상감, 철백화, 철유(鐵釉), 상형, 투각(透刻), 동화, 동채 기법으로 무늬를 화려하게 장식한 완과 접시, 발, 잔, 뚜껑 등의 일상용 그릇과 매병, 유병, 장고, 화분, 연적(硯滴), 장경병(長頸甁), 반구병, 대, 반, 합, 호, 자판[타일], 의자, 잔 받침, 수반, 마상배, 승반, 종, 기와, 다연, 주자, 벼루, 붓꽂이, 정병, 타호(唾壺), 고족배, 바둑판 등의 고급 그릇, 그리고 건축 자재와 문방구류 등 다양한 청자가 만들어졌다.
부안 유천리 요지와 부안 진서리 요지에서 출토된 고려청자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 번째 특징은 화려한 상감 청자 무늬에 있다. 하얀색과 검은색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흑백 상감 청자는 부안 고려청자의 정수이다. 무늬은 단순히 모란이나 국화와 같은 꽃문양을 반복하여 새긴 것도 있지만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 가능한 부안만의 독특한 정서가 드러난 무늬도 있다. 예를 들면 물가의 고즈넉한 자연 풍광을 담은 무늬, 즉 물새가 유유히 물 위를 헤엄치는 가운데 물가에 버드나무와 갈대가 하늘거리는 모습이라든가, 부부가 아름다운 정원에서 시를 감상하고, 쓰고, 악기를 연주하는 고려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무늬은 매우 드물고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부안 고려청자의 두 번째 특징은 높이가 50㎝~100㎝ 되는 대형 매병에 있다. 사람들은 이렇게 큰 부안의 청자 매병을 ‘대매병(大梅甁)’이라 부르는데, 부안 유천리 요지에서만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매병의 존재는 일제 강점기에 부안 청자 가마터에서 유출되어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유천리 일괄 유물 중에 섞여 있는 파편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높이가 80㎝에 달하는 상상을 초월한 크기의 용무늬 매병은 비록 일부가 훼손된 상태이지만,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는 매병 어깨 부분의 복사 무늬[袱紗紋, 비단(緋緞) 보자기 무늬를 새겨 넣은 것]와 온 몸을 감싼 용트림, 용의 발과 갈기, 비늘과 강한 기를 내뿜는 용의 얼굴은 고려 사람들의 기백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대매병은 고려청자 중에서도 매우 드문 예로 선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청자 상감 파도 용무늬 매병’은 높이 80.5㎝로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완형 매병 중 가장 큰 유물이다. 전라북도 전주에 소재하는 국립 전주 박물관에는 '청자 상감 구름 용무늬 매병'이 있는데, 높이 52.5㎝로 대형에 속하며 부안 유천리 대매병과 궤를 같이한다. 대매병은 13세기 무렵에 제작된 청자 기물로 실용적인 의미보다는 관상용으로 제작되었다고 추정되며,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이 적어 희소가치가 매우 높다.
세 번째 특징은 도자기에 세계 최초로 구리[銅]를 안료로 사용하여 붉은색을 내는 데 성공하였다는 점이다. 청자에서 붉은색을 내는 안료인 산화 동(酸化銅)은 가마 안의 불의 상태에 따라 녹색, 검은색, 붉은색 등 다섯 종류로 색의 변화가 나타나기 때문에 다루기가 매우 까다로운 재료이다. 대체로 산화 불꽃에서는 녹색을, 환원 불꽃에서는 붉은색을 띠며, 현재 남아 있는 청자 작품 중에 무늬에서 붉은색과 녹색이 함께 관찰되는 경우도 있다. 자기의 종주국인 중국에서도 산화 구리로 붉은색을 낸 시기는 14세기~15세기 원대·명대에 들어서였으므로 세계 최초로 산화 구리 안료를 이용하여 도자기에 붉은색을 구현해 낸 나라는 바로 고려이다. 13세기 전반 무렵 부안 유천리와 강진 사당리 청자 가마에서 제작에 성공한 것이다.
부안과 강진의 산화 구리 안료는 표현 수법이 좀 다른데, 강진 사당리 청자 요지에서는 산화 구리 안료를 그릇 전체에 씌운 동채(銅彩) 청자가 발견되었고, 부안 유천리 12호 청자 요지에서는 동채와 함께 모란꽃이나 포도 동자 무늬를 상감하고, 이 무늬의 일부분[모란 꽃잎 끝부분, 포도송이 등]에 산화 구리로 포인트를 주는 방식의 상감 동화(銅畵) 청자가 제작되었다. 제작지가 명확히 알려진 동화 청자로는 현재 부안 청자 박물관과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국립 중앙 박물관, 국립 전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부안 유천리 12호 청자 요지 출토 파편이 소량 전해지고 있을 뿐이며, 그 외 지역은 알려진 바가 없다. 동화 청자로 가장 명품을 꼽으라면 삼성 리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국보 제133호 ‘청자 동화 연화 무늬 표주박 모양 주자(靑瓷銅畵蓮花紋瓢形注子)’라고 할 수 있다. 이 유물은 고려 무인 정권의 최고 권력자였던 최항(崔沆)[?~1257]의 무덤에서 묘지석과 함께 출토되었다고 전해 오는 것으로, 1257년(고종 44)을 전후한 시기에 부안 유천리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네 번째 특징은 눈부신 햇살처럼 투명한 백색이 빛나는 고려 시대 도자기가 있는데 이름하여 ‘고려 백자’이다. 고려 시대 ‘청자’ 말고, ‘백자’라는 것이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생소할 것이다. 그러나 원래는 고려 초 10세기부터 청자와 백자가 함께 만들어졌는데, 고려 중기로 들어서면서 백자는 거의 사라지고 청자 위주로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다. 고려 중기인 13세기경에 ‘부안 유천리’와 ‘강진 사당리’ 지역의 각 한 곳의 요지에서만 고려백자를 극소량 만들었다. 오늘날 전해지는 유물의 수량이 워낙 적기 때문에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백자의 용도와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으로 연구된 바가 거의 없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부안 유천리에서 만들어진 고려백자에는 흑상감, 흑상감과 청자토를 함께 상감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흑상감 또는 흑상감과 청자토로 상감 무늬를 장식한 고려백자는 매우 희귀하여 온전한 형태로 알려진 예는 국립 중앙 박물관에 소장된 몇 점밖에 없으며, 이외에는 파편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과 부안 청자 박물관에 소장된 부안 유천리 12호 요지 일대 출토 유물과 발굴 유물이 소량 있다.
끝으로 다섯 번째 특징은 부안 지역에서 나오는 태토[자기를 만드는 흙]에 의해 나타나는 신비로운 비색에 있다. 고려청자는 유약층 아래에 새긴 무늬를 드러나 보이게 하기 위하여 유약을 최대한 얇게 입힌다. 투명하고 얇은 유약 아래 비치는 상감 문무늬는 실루엣을 보는 듯 섬세한 맛이 감돈다. 부안의 청자 흙은 강진의 흙에 비해 철분이 약간 더 함유되어 있어서 굽게 되면 회색이 짙게 나온다. 여기에 비색 청자 유약을 입히면 회색 태토 색깔이 유약 사이로 비쳐, 밝고 청명한 대낮보다는 달빛이 어스름한 저녁 하늘빛이 연상된다. 드러낸 화려함과 청량함이 아닌 은근히 멋을 부린 귀부인의 기품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종잇장처럼 얇고 바람에 날릴 듯 섬세한 무늬, 유리처럼 투명한 가을 하늘색 유약 등에 신비하고 복합적인 그 무엇인가가 부안 고려청자에 숨어 있는 듯하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부안 유천리 요지와 부안 진서리 요지는 좋은 재료와 뛰어난 제작 기술을 이용하여 일상용 청자를 비롯해 고려 왕실과 귀족층이 사용하는 최고급 자기까지 다량으로 생산한 곳이며, 전성기 고려청자의 정수를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부안 고려청자 요지의 도자사적 의의]
줄포만 연안에 자리한 부안 유천리 요지와 부안 진서리 요지는 11세기 후반~14세기 전반에 대규모로 청자를 생산하였던 곳이다. 줄포만 연안에서 이처럼 다량의 청자를 제작할 수 있었던 요인은 청자 원료인 질 좋은 고령토가 많고, 국가의 재목창이었던 변산의 풍부한 땔감, 조창과 서해 조운로를 통한 체계적인 운송 등의 지리 환경적 입지가 잘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최고급 청자를 제작하기 위한 기술이 수반되어야 하는데, 그동안 발굴 조사된 자료에 의하면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일어나는 가마의 구조적 변화[불턱의 변화, 초벌 전용 칸의 등장, 요전부에 나뭇재를 모아 두기 위한 감실 모양의 재칸 시설 등]를 통해 12세기 후반 녹색을 띠는 불투명한 청자에서 13세기 아름다운 비색 상감 청자를 완성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청자를 제작하는 장인의 뛰어난 솜씨와 독창성, 끊임없는 실험을 통한 새로운 기술의 축적은 타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자기를 만들어 냈다. 그 예로 높이가 50㎝~100㎝ 되는 대형 매병, 산화 구리를 이용한 선홍빛 안료의 개발, 신비로운 비색의 아름다운 청자색,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개성 있는 상감 무늬 등은 한국 자기 문화를 통틀어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는 특징으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