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1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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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磻溪柳馨遠-實學思想-扶安愚磻洞 |
영어공식명칭 | Silhak Idea and Buan Ubahn-dong in the Bangue Liu Hyungw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재철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53년 - 유형원 부안 우반동으로 이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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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70년 - 『반계수록』 완성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94년 - 유형원 동림서원 배향 |
관련 지역 | 반계 유허비 -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산128-1 |
관련 지역 | 반계서당 -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
관련 지역 | 동림서원지 -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가오리 동림마을 |
관련 지역 | 유형원 묘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산28-1 |
[정의]
조선 후기 전라북도 부안군에 거주하였던 실학자 유형원의 삶과 학문, 사상.
[개설]
유형원(柳馨遠)[1622~1673]의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덕부(德夫), 호는 반계(磻溪)이다. 세종(世宗) 때 우의정을 지낸 유관(柳寬)의 9세손이다. 할아버지는 정랑 유성민(柳成民)이며, 아버지는 예문관 검열 유흠(柳𢡮)이다. 외할아버지는 여주 이씨(驪州李氏) 이지완(李志完)이다. 유형원은 열다섯 살 때 병자호란을 겪고 조부모와 어머니를 모시고 강원도 원주로 피난하였다. 열여덟 살에 부사 심은(沈誾)의 딸과 혼인하였다. 서른두 살 때인 1653년(효종 4) 부안현(扶安縣) 우반동[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으로 이거하여 정착하였다. 유형원은 이곳 우반동에서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는 농민들과 사회 현실을 겪으면서 쉰두 살에 운명할 때까지 세상을 주유하며 사회 개혁을 담은 책을 썼다.
우반동의 아름다움은 우반 십경(愚磻十景)에 잘 남아 있다. 일찍이 허균(許筠)[1569~1618]이 우반동의 정사암을 중수해서 머물기도 하고 소설 『홍길동전』을 구상하기도 하였다. 우반동이 번창한 마을로 바뀐 것은 유성민이 이곳으로 들어오면서부터일 것이다. 그 뒤 김홍원(金弘遠)[1571~1645]이 유씨 집안의 토지를 사들이고 손자 김번(金璠)이 우반동에 들어오면서 부안 김씨(扶安金氏) 세거지로 번창하였다고 전한다.
[유소년기]
유형원이 태어난 곳은 서울 소정릉동[현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외가이다. 외할아버지 이지완은 정치적으로는 북인 계열의 남인(南人)이며 서울에 거주하는 정통 양반 가문 출신이었다.
유형원은 두 살 때 아버지를 잃는다. 유흠이 광해군(光海君)의 복위 운동과 관련됐다는 유몽인(柳夢寅)의 옥에 연좌되어 스물여덟 살 젊은 나이에 옥사한 것이다. 유형원은 이렇다 할 스승 없이 자랐으나, 외삼촌 이원진(李元鎭)[1594~1665]과 고모부 김세렴(金世濂)[1593~1646]에게 학문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원진은 이익(李瀷)의 당숙으로 하멜 표류 사건 당시 제주 목사로 있었다. 김세렴은 호조 판서와 평안도 관찰사 등을 지내면서 조선의 주요 사회 경제 정책을 추진한 관리였다.
[병자호란을 만나다]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선조 31)까지 약 7년간 계속되었던 임진왜란은 조선의 국토를 황폐화시켰고 인명 피해 또한 막심하였다. 오랜 전쟁으로 조선 전기에 정비된 여러 제도가 지닌 모순과 한계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모순을 해결할 새로운 제도 정비가 시급하였다. 그러나 1623년(광해군 15)의 인조반정(仁祖反正)과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등이 이어지면서 정국을 안정시키기에는 어려움이 컸다. 임진왜란의 참화도 극복하기 어려운 때에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6년]이라는 대참사가 연이어 찾아왔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유형원은 조부모와 어머니를 모시고 강원도 원주로 피난을 갔는데, 어린 나이지만 청나라에 당한 조선의 치욕에 백성의 한 사람으로 심한 상처를 받았다. 훗날 국방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청에 대한 복수심을 갖게 된 것도 병자호란을 겪은 그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유형원이 열다섯 살 때 겪은 병자호란은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유형원이 살았던 17세기 조선의 시대적 과제는 양란의 후유증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1642년(인조 20) 유형원은 경기도 지평에, 다음 해에는 경기도 여주에 거처를 잡았다. 1643년에는 고모부 김세렴이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자 그곳에 따라가 북방 지역의 실상을 경험하였다. 유형원은 한정된 지역에서만 거처했던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지역의 경험을 가지면서 조선 사회의 현실을 목격한 학자였다. 유형원이 그의 대표작 『반계수록(磻溪隨錄)』에서 토지 제도와 농업, 교육 문제 등에 대해 다양한 개혁 정책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경험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부안 우반동으로 내려오다]
유형원이 낙향한 것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으로 인한 정치적 좌절과 함께 할아버지 유성민이 경작하던 우반동(愚磻洞)의 농장을 경영하기 위해서였다. 유형원 집안의 우반동 땅은 오랫동안 묵힌 상태였다. 유성민은 유형원이 낙향하기 40여 년 전인 1612년(광해군 4) 우반동에 내려와 논밭을 일구어 경작하였는데, 병자호란이 끝나자 아예 우반동에 내려와 거처하였다. 유형원은 할아버지 유성민이 1651년(효종 2) 세상을 떠나자 삼년상을 마치고 한양을 떠나 서른두 살 때인 1653년(효종 4) 부안으로 낙향하였다. 유형원의 심경을 담은 「부안에 도착하여[到扶安]」라는 시를 읽어 보자.
“세상 피해 남국으로 내려왔소/ 바닷가 곁에서 몸소 농사지으려고
창문 열면 어부들 노랫소리 좋을시고/ 베개 베고 누우면 노 젓는 소리 들리네
포구는 모두 큰 바다로 통했는데/ 먼 산은 절반이나 구름에 잠겼네
모래 위 갈매기 놀라지 않고 날지 않으니/ 저들과 어울려 함께 하며 살아야겠네.”
위 시에서 ‘세상 피해 남국으로 내려왔소’라는 첫 구절에 주목해 보자. 유형원이 만난 ‘세상’은 어떠했을까? 열다섯 살 때 겪은 병자호란은 그가 기존에 배운 유학의 자부심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남한산성으로 피했던 인조(仁祖)는 오랑캐라고 무시했던 청나라에 항복하여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갖춘다. 여기서 고두는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하는 것이다. 이런 치욕스런 일을 당했음에도 책임을 져야 할 정치 세력은 인조 주변에서 여전히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바른 정신을 가진 정권이라면 청나라에게 당한 치욕을 잊지 않고 통렬하게 반성하며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도 개선과 책임을 지는 자세가 뒤따라야 한다. 이런 세상에 분노한 유형원은 청에 대한 복수를 당연시하였다. 우반동에 와서는 하루 300리를 달릴 수 있는 준마를 키우고 집안의 노복과 동리 사람들에게 양궁과 조총 다루는 법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마흔한 살 때는 서울에 올라가 외가인 정동에 머물면서 나라를 다시 일으킬 방략인 『중흥위략(中興偉略)』이라는 책을 저술하였으나 끝내 완성은 하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유형원은 부안에 내려오면서 세상을 경영하고자 하는 방략을 포기하고 은둔했을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은둔은 아니다. ‘반계(磻溪)’라는 호에서 이유를 찾는데, ‘반계’는 유형원이 살던 마을을 흐르는 시내에서 따왔다고 하나, 부안 김씨 고문서에는 마을 앞을 지나는 개울 이름은 장천(長川)이었다. 반계는 오늘날 중국 섬서성 보계시 동남에 있는 강물이다. 이곳은 강태공(姜太公)이라 부르는 태공망 여상(呂尙)이 주나라 문왕(文王)을 만나기 전에 낚싯대를 드리웠던 곳이다. 세상에서 자기를 알아주는 주인이 나타나기 전까지 강가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는 강태공은 늦게나마 문왕을 만나 주나라를 세우는 천하 대업에 일조할 수 있었다.
전쟁 중에 피난을 다니면서 유형원은 청에게 고국의 산하가 짓밟히는 참혹함과 유리방황하는 백성들을 두 눈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선을 다시 일으킨다는 것은 강태공이 문왕을 도와 나라를 세웠듯 나라를 다시 세울 정도의 혁명이 필요함을 공감했을 것이다. 유형원은 이곳 우반동에서 밤낮을 잊고 나라를 개혁할 방안을 찾고 있었다.
제자 김서경(金瑞慶)은 『담계유고(澹溪遺稿)』에서 스승의 우반동 집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소나무 아래, 대나무 숲에 초가집을 짓고 방관(方冠)에 가죽 혁대를 띠고서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마음에 새기고서 깊이 생각하였고 지극히 연구하여 정미함을 다하여 나의 마음에 계합(契合)[부합]하고… [중략] 우반동 후원에 세 갈래 길 열어 놓으니 소나무길, 대나무길, 국화길이다. 서가에 만권의 서적[성현의 경전]이 있었다.”
제자의 눈에 비친 스승 유형원의 우반동에서의 삶은 전투에 참전하기 전 장수처럼 긴 호흡으로 자신과 주변을 살피는 엄숙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시를 통해 본 부안 생활]
유형원은 세상을 주유하였다. 금천, 안양, 영남, 호서 지방과 금강산 등지를 두루 돌아다녔다. 젊은 날 북방에서의 생활 경험과 전국을 두루 순력한 것은 유형원의 사회 개혁 정책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유형원은 우반동에 내려와 살면서도 세상을 살피며 다니는 것을 꾸준히 하였다.
우반동에 살던 유형원이 대처에 나가기 위해서는 부안현 동편의 동진강(東津江)을 건너가야 한다. 강을 건너는 다리가 있었다면 동진나루는 크게 역할이 줄었겠지만 다리가 없으니 나루가 그 역할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 나루터에 닿으려면 우반동에서 아침 일찍 출발하였을 것이다. 늦게 출발하면 동진나루 주막에서 하룻밤을 머물 수도 있다. 우반동에서 출발하여 거치는 길이야 보안면의 영전을 거쳐 수랑뜰과 주산, 석동산 옆 학당고개를 거치는 부안남로를 택했을 것이다. 남문을 통해 부안읍성으로 들어간다면 객사 앞을 지나 동문안 당산을 보며 동문인 청원루(淸遠樓)를 지나 혜성병원 뒤쪽의 망기산 고개를 넘어 동진강으로 향하였을 것이라 짐작한다. 주산의 율포(栗浦)를 통하면 고부천에 배를 띄워 동진나루에 닿을 수 있다. 우반동 집에서 걷거나 말을 타고 동진나루에 가거나 율포에서 배를 타고 갈 수 있었다.
유형원이 만난 동진강은 썰물과 밀물 때가 되면 바닷가로 생각될 정도로 거칠었다. 강 주변 마을엔 안개가 끼어 있고 나무가 드문드문 서 있었다. 유형원은 동진강 나룻배를 기다리며 주막에서 쉬거나 숙박도 한 것 같다. 그의 시문에는 동진에 관한 시 6편이 전한다. 「동진의 시골 주막에서 나그네 회포[東津野店客懷]」에서는 “하늘가에 돌아오는 기러기 있어/ 너무도 처량해 고향 생각나는구나”라는 시구가 보인다. 여기서 고향은 어디를 가리킬까? 잠깐 떠나온 우반동을 고향이라 하기에는 선뜻 공감하기 어렵다. 어린 날의 추억이 묻어 있던 삶터 한양을 고향으로 해석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부안으로 내려왔지만 여전히 마음은 한양을 향하고, 지역 사람들과 잘 섞이지 못하는 심정을 시에 담았다고 하겠다. 이곳에서는 하늘을 오가는 기러기조차 자신의 마음 같아서 외롭고 처량하게 보였을 것이다.
「동진에서 나그네 회포를 읊다[東津客懷]」라는 시에서 유형원은 자신을 남쪽 땅 나그네로 표현하였다. 내려와 살고 있는 부안을 타관이라 하고 자신의 삶터인 한양을 생각하며 동진에서 밤을 지내면서 쓴 시로 보인다. 30여 년을 살던 한양을 떠나 부안으로 내려왔으니 그 자신은 객[손]이요, 나그네이다.
「동진촌 장에서[留東津村莊]」라는 시는 유형원이 서른다섯 살인 병신년[1656년]에 동진강 근처에 집을 마련해 두고 살면서 쓴 작품이다. 유형원은 아예 동진에서 농사를 지을 땅도 마련하였다. 그의 시 「동진농장에서 벼 베는 일을 감독하며[往東津農場監刈禾]」라는 시가 그것을 말해 준다. 유형원이 어디에 집을 마련하였는지 현재는 찾을 수 없지만 동진나루와 멀지 않은 곳에 마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유형원은 동진나루 근처에 집과 땅을 마련해 두고 대처로 나갈 때 수시로 이용하였다.
부안 사람들이 타지로 나들이할 때는 동진나루를 건너 죽산을 지나 내재역을 거쳐 김제, 금구 또는 이서를 지나 전주에 갔으며, 또 울렝이의 해창을 지나 만경의 사창나루를 건너 임피의 소안역으로 하여 충청도 논산 땅을 지나서 한양 나들이를 하였다. 만경현에 가는 경우 『여지도서(輿地圖書)』 부안현 편에 따르면, 현재의 동진나루보다는 북쪽인 동진강 하구에서 배를 타고 만경현 북창을 향하는 길을 택하였을 수도 있다.
[『반계수록』을 쓰다]
유형원이 부안으로 내려온 것은 할아버지를 대신해 부안의 농장을 경작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이는 부안과 유형원의 관계가 알려진 것보다 더 깊고, 그의 개혁 사상이 실제 농장 경영을 통해 나왔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극복하고 사회 질서가 재편되기를 요구 받았던 17세기 중후반 조선 사회에는 새로운 사상이 필요하였다.
유형원의 『반계수록』은 국가 운영과 개혁에 대하여 논한 책이다. 당시의 국가 정책을 비판하고 구세제민을 위한 강력한 혁신안을 제안한 책으로, 균전제(均田制)를 중심으로 하는 토지 개혁안이 담겨 있는 26권 13책이다. ‘수록(隨錄)’은 ‘붓 가는 대로 따라서 쓴 기록’이란 뜻이지만, 유형원은 결코 한가하게 책을 써 내려가지 않았다. 시대의 고민을 담아 구체적인 개혁 방안까지 제시하였다. 치밀하게 사회와 경제 문제를 고민하고 그 대책을 제시하며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담았다. 스스로가 쓴 서문에서 유형원은 개혁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한 현실임을 강조하면서, 과거 위주의 공부보다는 실제 현실에 필요한 정책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하였다.
『반계수록』의 1~8권까지는 저자가 토지 제도에 깊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유형원은 국가에서 토지를 농민에게 고르게 분배하고 조세를 환수할 수 있는 균전제(均田制)의 실시로 자영농 육성을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9~12권은 교육과 과거의 문제점과 그 대책을 담고 있다. 유형원은 과거가 출세의 도구가 되어 선비들이 오직 옛 문구만 모으는 것에 치중하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그 대안으로 추천제인 천거제(薦擧制) 실시를 주장하였다. 13~18권은 관직의 정비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유형원은 관료의 임기제를 철저히 지켜 행정이 실효성을 갖고, 왕실을 위하여 설치된 많은 관청은 대폭 축소하여 국가의 재정을 안정시키자고 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현대에도 요구되는 ‘작은 정부’의 구상과 유사하다.
19~20권은 관료의 봉급을 증액하여 부정이 없도록 하며, 특히 봉급이 전혀 지급되지 않는 하위직 서리에게도 일정한 봉급을 지불하여 백성을 수탈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이 주목을 끈다. 21~24권까지는 병제 등 국방과 군사 제도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병농 일치의 군사 조직과 함께 성지(城池)의 수축과 무기의 개선, 정기적인 군사 훈련을 실시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반계수록』은 저자 유형원이 재야의 학자였던 까닭에 처음에는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1678년(숙종 4) 유형원과 교분이 깊었던 배상유(裵尙瑜)가 상소문을 올려 『반계수록』에서 제시한 정책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고, 1741년(영조 17)에는 승지 양득중(梁得中)이 경연에서 『반계수록』을 강론하자는 요청을 하는 등 꾸준히 중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마침내 1770년(영조 46) 『반계수록』은 경제와 관련한 탁월한 저술로 인정받아 국가에서 3부를 인쇄, 간행하였다. 재야 학자의 저술이 사후 100년 만에 그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정조(正祖) 역시 『반계수록』에 주목하였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면서 우리나라 학자들의 성제(城制)에 관한 이론을 검토한 끝에 유형원이 수원에 성지(城池)를 건축해야 한다는 주장에 주목하였다. 정조는 “100년 전에 마치 오늘의 역사를 본 것처럼 논설하였다.”라고 하면서 유형원을 높이 평가하고, 수원성의 건축으로 그 이론을 실천에 옮겼다. 『반계수록』은 유형원이 활동하였던 시대를 뛰어넘어, 영조(英祖)와 정조의 시대에 그 가치를 더욱 인정받았다. 또한 이익(李瀷), 정약용(丁若鏞)으로 이어지는 남인 실학자의 개혁 사상의 원류가 되면서 『반계수록』은 ‘개혁 교과서’의 모범으로 인식되었다.
많은 사람이 ‘유형원’ 하면, 실학사상을 체계화한 그의 대표작 『반계수록』 때문에 사회 개혁가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유형원은 다양한 학문에 두루 능통한 지식인이었다. 이익이 쓴 유형원의 전기를 보면, 그는 문예·사장(詞章)·병법·천문·지리·의약·복서(卜筮)·산학(算學) 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능통하였다. 이러한 학문의 폭은 이미 알려진 역사책 『동사강목조례(東史綱目條例)』 외에 어학에 관한 『정음지남(正音指南)』과 『동국문초(東國文抄)』, 지리지인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 병법서인 『기효신서절요(紀效新書節要)』와 『무경(武經)』, 도가서인 『참동계초(參同契抄)』의 저술로 나타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반계수록』과 『동사강목조례』, 『동국여지지』만이 남아 그의 폭넓은 학문 세계는 감추어져 있다.
[유형원, 실학자인가]
유형원을 ‘실학(實學)의 선구’라고도 하고 ‘실학의 비조(鼻祖)’라고도 부른다. 그러한 인물이 부안의 우반동에 살면서 많은 저작을 남겼다는 사실은 부안의 자랑이기도 하다. 학교에서는 유형원을 이어 이익으로, 그 뒤를 이어 정약용으로 계승되면서 실학이 전승되고 발전되었다고 배운다. 그런데 ‘유형원을 실학자라고 불러도 좋을까?’라는 다소 돌발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첫 번째 출발은 실학이라는 시대정신은 조선 사상사의 특정한 조류를 규정하기 위하여 후대 학자들이 만든 개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조선 사상사에 과연 ‘실학’이라는 것이 정말 있었는가?라는 근원적인 물음도 따른다. 상식적으로 유학자들은 자신의 학문이 실질 생활에 적용될 수 있는 실학(實學)이라고 했지 허학(虛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주자(朱子)의 책 『중용장구(中庸章句)』에서도 앞머리에 실학이라는 언사가 있는 것을 보면 주자학은 곧 실학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실학의 개념이 등장한 것은 1930년대 일제 치하에서 서구 문물에 노출되고 민족주의를 자각한 소수 엘리트의 글에서 시작된다. 광주 학생 운동[1929년]과 일본의 만주 침공[1931년]을 고비로 한국 민중의 저항 운동이 완전히 봉쇄되었다. 이에 따라 내적이고 심층적인 저항 운동밖에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전개된 민족 운동의 사상적 기치로 실학이 개발된 것이라는 지적이다. 여기에는 최남선(崔南善)이 조선 후기 신학풍을 실학이라고 최초로 얘기하고, 문일평은 실학을 실사구시의 동의어로 썼다. 정인보(鄭寅普)·안재홍(安在鴻) 등은 ‘정약용 서거 100주년 기념 토론회’에서 실학자를 ‘근대 국민주의의 선구자’라고 자리매김하며 서양의 루소와 비교하였다.
유형원은 조선의 혼란을 마음 아파하고 삼대(三代)[하·은·주]를 숭상하고 지향하였다. 참으로 삼대(三代)의 제도와 정치를 행한다면 오늘날의 혼란을 회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유학자로서 성리학에서 현실 방안을 구하고자 하였다. 원시 유학 속에서 해결 방안을 찾고자 하였으니, “유학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라는 생각 속에서 살았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유형원이 실학자이냐, 아니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궁벽한 시골에 살면서 외세 때문에 위난에 처한 조선의 나아갈 길을 현실적으로 고민하고 책을 써서 후세에 남겼고, 자신의 처지에서 ‘행동하는 지성’을 보였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유형원에 대한 실학 논쟁은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유형원을 실학자라 규정한 것은 후대인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실학이라는 고정된 관점으로 유형원을 보기보다는 오히려 시대를 고민하는 유형원을 통해 당시의 사회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유형원을 실학이라는 개념으로 한정하기보다는 실학을 넘는 더 큰 사상가요, 나라를 구하려는 실천의 지식인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부안의 지인과 제자들]
유형원의 교우 관계는 넓었다.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을 여러 차례 찾았고, 청하(靑霞) 권극중(權克中)[1585~1659]과 교유 관계도 가졌다. 부안 주산의 송시추(宋時樞)[1620~1670], 상서의 김윤필과도 왕래하였고, 김서경(金瑞慶)·유문원(柳文遠)·유재원 등의 제자들은 모두 부안 사람이다. 그의 개혁 사상을 집대성한 『반계수록』을 집필한 곳이 부안 우반동이고, 20년간이나 살았지만 부안에는 유형원에 관한 지역 자료들이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부안에서의 그의 삶은 잘 밝혀지지 않았다. 이렇게 된 것은 그간의 조사 연구들이 유형원의 개혁 사상에 초점을 맞추고, 부안에서의 생활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형원이 교우했던 주산면 사산리의 송시추는 유형원의 제자인 삼우당(三友堂) 유문원(柳文遠)과 유재원의 외숙이다. 유형원이 쓴 「사산 송씨의 서재」라는 시에서 송시추의 집을 방문하여 식사 대접을 받고 환담한 것을 보면 평소에도 깊은 관계를 가진 듯하다. 유형원의 제자 담계(澹溪) 김서경(金瑞慶)은 부안군 상서면 동림리 출신으로 생원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유형원의 문하에서 학문에 정진하는 촉망받는 학자였다. 유문원은 유형원의 재종제이며 제자였다. 유문원을 유형원과 함께 동림서원에 향사한 것으로 보아 부안군에 이사 와서 학문과 덕행을 닦은 선비로 추정된다.
실제로도 부안에는 많은 제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김서경이 유형원의 행장을 지을 때 “제자들을 대표하여 스승의 일대기를 짓는다.”고 한 것에서도 추정할 수 있다.
호남 사림이 주관하여 1694년(숙종 20) 부안군 상서면 가오리 동림마을에 세웠던 동림서원에는 유형원과 김서경, 유문원, 초당(草堂) 김회신(金懷愼) 네 사람을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지금 그 자리에는 유허비만 남아 있다.
유형원의 문인들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우선 당색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유형원은 북인 계열로 북인이 몰락하자 남인 계열로 흡수되었다. 동림서원이 건립된 1694년은 기사환국[1689년] 이후 남인이 잠시 집권하던 때였다. 유형원이 실각한 북인과 남인 계열인 것이 그의 후학이 묻혀 버린 이유로 생각된다. 유형원 사후 우반동에 부안 김씨가 들어와 새 주인이 되었던 것도 한 요인이었다고 본다. 부안 김씨 김홍원이 유형원의 할아버지 유성민으로부터 전답 30결을 매입하고, 이후 그 후손들이 우반동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부안 김씨는 ‘우반동 김씨’로 일컬어졌다. 유형원이 실각한 북인과 남인계이고, 그 후손들이 우반동을 떠남으로써 부안에서의 그의 삶의 흔적들이 묻힌 것이다.
[맺는말]
유형원이 살았던 시대는 7년 동안의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때였다. 더욱이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곧이어 병자호란까지 겹치면서 조선왕조의 문제점이 드러나며 한계에 부딪혔던 시기였다. 특히 양란으로 많은 인명이 살상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고, 유랑하는 농민이 증가하면서 농토는 황폐화되었으며, 토지 제도가 문란해져 국가의 재정이 파탄 상태에 직면하였다.
이 엄혹한 시대에 유형원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부안 사람들과 함께 살며 호서와 영남 지역까지 살피며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반계수록』은 조선 후기 국가 개혁안의 교과서로 평가받는 저술이다. 이 책에는 극도로 피폐한 국가 현실을 바로잡을 예리한 통찰과 탁월한 개혁안이 담겨 있다. 토지를 백성에게 균등하게 배분하는 균전제 실시, 세제와 녹봉제의 확립, 과거제 폐지와 천거제 실시, 신분·직업의 세습제 탈피와 기회 균등 구현, 관제·학제의 전면 개편 등이 주요 개혁안이다. 유형원 이전에도 현실 사회의 모순을 타파하고 이상 국가론을 제시한 사상가는 많았다. 그러나 유형원은 관념적이지 않은, 현실에 바탕을 두고 국정과 사회 제도 전반에 걸친 일대 개혁을 논하고 있다.
허목이 유형원을 가리켜 “왕을 곁에서 보좌할 만한 재목“이라고 칭찬하였지만 생존 당시 그의 사상과 개혁안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유형원은 유명을 달리한 지 100년이 가까워서야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반계수록』도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반계수록』에 관심을 갖고 그 초고를 읽어 본 영조는 탁월한 내용에 감탄, 이를 인쇄하여 널리 세상에 알릴 것을 명하였다. 백성의 고통에 가슴 아파했던 유형원의 뜨거운 열정, 오직 조선의 개혁을 위해 책을 쓰며 일생을 바쳤던 그의 개혁 정신과 주장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부안 우반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