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12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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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邊山-古典文學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가,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영미 |
[정의]
고려 후기부터 개항기까지 전라북도 부안군의 변산을 배경으로 노래한 한시 작품.
[개설]
변산은 풍광이 특별히 빼어나서 예부터 방장산이나 봉래산 같은 삼신산의 하나로 불렸고, 많은 시인 묵객들이 변산을 즐겨 찾아와서 그 경치를 읊었다. 고려 시대의 이규보(李奎報)[1168~1241]를 비롯하여 조선 시대에는 수많은 문인들이 변산 관련 시들을 남겼다. 조선 시대에 전라도가 삶의 터전이었던 많은 문인·학자들과 부안 변산에서 우거했던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1622~1673]이나 교산(蛟山) 허균(許筠)[1569~1618] 같은 인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전라도 관찰사로 내려왔던 인물들, 그 밖에 유람 목적으로 변산을 방문했던 많은 문인들의 시문들이 전해지고 있다.
유명한 문인들의 한시 속에 드러난 변산의 대략적인 모습을 보면, 부안의 아름다운 산과 바다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이때 변산은 현재 지리적으로 변산면에 해당되는 지역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부안을 통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변산의 작목사, 이규보의 한시]
변산을 읊은 대표적인 시인을 언급할 때 고려 시대 이규보를 빼놓을 수 없다. 이규보는 1199년부터 2년 동안 전주 막부(全州幕府) 수령직을 수행했는데, 그 당시에 조칙을 받들어 벌목하는 일의 책임자를 맡아 변산에 오게 된다. 그는 변산에 들어와서 처음 본 변산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층층한 봉우리와 겹겹한 멧부리가 솟았다 엎뎠다 구부렸다 폈다 하여 그 머리나 꼬리의 놓인 곳과 뒤축과 팔죽지의 끝난 곳이 도대체 몇 리인지를 알 수가 없었고 옆으로 큰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 『동국이상국전집』 권23]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규보가 지은 변산 관련 한시들 중에 「말 위에서 짓다[馬上作]」[『동국이상국전집』 제9권]라는 고율시(古律詩)를 보면 “변산은 예부터 천부라 일컫는데, 좋은 재목 가리어 동량으로 쓰리라[邊山自古稱天府 好揀長村備棟欀]”라는 구절이 있다. 즉 변산을 한마디로 ‘천부(天府)’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천부는 산천과 물이 좋은 곳, 혹은 흙이 매우 기름져서 생산물이 많이 나오는 땅을 이르는 표현인데, 이규보가 보기에 변산은 천부의 지역이었던 것이다.
특히 변산 의상봉에 있는 망해대(望海臺)에서 읊은 부분을 살펴보면, “큰 바다가 둘러 있는데 산에서 거리가 겨우 백여 보쯤 되었다. 한 잔 술, 한 구 시를 읊을 때마다 온갖 경치가 제 스스로 아양을 부려 도무지 인간 세상의 한 점 속된 생각이 없어 표연히 속골(俗骨)을 벗고 날개를 붙여 육합(六合) 밖으로 날아나가는 듯, 머리를 들어 한 번 바라보니 장차 뭇 신선을 손짓하여 부를 듯하였다.”[「남행월일기」]라고 하였다. 서해와 변산을 볼 수 있는 망해대에서 바라보는 변산을 선계인지, 불계인지 모를 정도의 아름다움을 지닌 곳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규보는 변산의 유명한 개암사의 ‘원효방(元曉房)’과 월명암 의상봉 아래 ‘불사의방장(不思議方丈)’ 등을 유람하면서 다리가 와들와들 떨리는 절벽 풍경 등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원효방과 관련한 시를 짓기도 했는데, 원효와 관련해서 전해 오는 이야기들은 물론 원효방이 위치한 곳의 정취를 보여주는 시이다.
순산도위제(循山度危梯)[산을 따라 위태로운 사다리 건너고]
첩족행선로(疊足行線路)[발을 겹치며 선로를 다니네]
상유백인전(上有百仞巓)[위엔 백 길의 산마루 있으니]
효성증결우(曉聖曾結宇)[원효가 일찍이 집 짓고 살았네]
……
-「팔월 이십일에 능가산(楞迦山) 원효방에 제하다 병서[八月二十日 題楞迦山元曉房]」, 『동국이상국전집』 제9권.
「변산(邊山) 노상에서 짓다[邊山路上作]」[『동국이상국전집』 제9권] 같은 한시도 변산과 관련된다. 이규보는 변산의 풍경을 보고, “정서가 스스로 흔들려서 당초 시를 지을 생각을 하지 않는데도 나도 모르게 시가 저절로 지어졌다.[「남행월일기」]”고 서술하였다. 변산의 풍경에 마음이 홀려 저절로 시가 읊어졌다는 것이다.
일춘삼과차강두(一春三過此江頭)[한 해 봄에 세 번이나 이 강가를 지나니]
왕사하증원미휴(王事何曾怨未休)[왕사가 어찌 이렇게도 쉬지 못하게 하는고]
만리장도분백마(萬里壯濤奔白馬)[만리라 장엄한 파도는 백마가 달리는 듯]
천년노목와창규(千年老木臥蒼虯)[천년이라 늙은 나무는 푸른 교룡이 누웠는 듯]
해풍취낙만촌적(海風吹落蠻村笛)[바닷바람은 만촌에서 나는 피리 소리 전하고]
사월내영포곡주(沙月來迎浦谷舟)[모래에 비친 달빛은 포곡에 뜬 배를 맞이한다]
옹거추동응괴아(擁去騶童應怪我)[추동을 거느리고 가니 응당 나를 괴이하게 여기리라]
매봉가경입지류(每逢佳景立遲留)[아름다운 경치 만날 적마다 오래 머무네]
-「변산 노상에서 짓다」
그 외에 부안에서의 감상을 읊은 「정월 십구일에 다시 부령군에 이르러 짓다[正月十九日 復到扶寧郡有作]」[『동국이상국전집』 제9권]라는 시도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 변산을 읊은 시인들]
조선 시대의 많은 문인 학자들이 변산을 찾아와 시문을 남겼다. 먼저 조선 전기의 대학자인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가랑비 오는 날 부안을 지나며 시를 읊는다. 「부안」이라는 제목의 시로, 부안의 강산이 ‘시 짓기에 알맞다’는 평을 하고 있다. 이 시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실려 있다.
천가소우우숭조(天街小雨又崇朝)[하늘엔 가랑비가 또 아침 내내 내리는데]
수연황금염류조(誰撚黃金染柳條)[누가 황금을 배배 꼬아 버들가지 물들였나]
동학청풍생원뢰(洞壑淸風生遠籟)[골짝의 맑은 바람 소리는 멀리 울려 퍼지고]
해문잔월낙한조(海門殘月落寒潮)[해문에 지는 달빛은 찬 조수에 떨어지네]
일루잠적의고침(一樓岑寂宜高枕)[한 누각은 고요하여 편히 잠자기 마땅한데]
고도황량지와교(古渡荒涼只臥橋)[옛 나루는 쓸쓸해라 누운 다리뿐이로다]
수처강산감작부(隨處江山堪作賦)[가는 곳마다 강산은 시 짓기에 알맞건만]
다참졸필경난묘(多慙拙筆竟難描)[끝내 묘사하지 못하는 졸필이 하 부끄럽네]
-『사가시집보유』 제3권.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 같은 학자는 「부안현에서 자준 영공이 노자로 준 시운에 화답하다[扶安縣和子俊令公贐行韻]」라는 시를 남겼다. 이는 자준(子俊)과 변산 의상봉에 있는 망해대에서 회포를 풀며 그 감흥을 시로 남긴 것이다.
조광조의 문인으로 기묘명현 중 한 사람인 덕양(德陽) 기준(奇遵)[1492~1521]도 변산을 노래한 시들을 다수 남겼다. 기준은 무정 현감으로 재직 중인 맏형 기형(奇逈)을 만나 변산을 유람하며 소감을 드러냈는데, 그때 남긴 「향변산도중(向邊山道中)」, 「회변산유감(懷邊山有感)」, 「억변산구유서여승상순(憶邊山舊遊書與僧尙淳)」 등이 『덕양유고』에 실려 있다. 그 밖에 부안에 소재한 월명암, 의상암, 등운사, 내소사 등 다양한 사찰들을 노래한 기준의 한시들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 중기의 학자 정두경(鄭斗卿)[1597~1673]은 「부안의 수령으로 가는 이경억을 전송하다[送李扶安 慶億]」라는 오언 고시가 한 편 전해 오는데, ‘부안은 큰 바다가 하늘에 닿고 변산은 구름에 닿은 아름다운 곳’이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
회계북침강(會稽北枕江)[회계 고을 북쪽으론 강이 있는데]
엄조증리차(嚴助曾莅此)[한나라 때 엄조가 이 고을 맡았네]
이후재부안(李侯宰扶安)[이후께서 부안 고을 수령 됐는데]
지형진상사(地形眞相似)[그곳 지형 회계 땅과 정말 비슷네]
거해박천류(巨海拍天流)[큰 바다는 하늘 닿아 일렁거리고]
변산접운기(邊山接雲起)[변산은 또 구름 닿아 솟아 있다네]
거거수가정(去去樹佳政)[그곳에 가 아름다운 정사 펼쳐서]
성명만남기(聲名滿南紀)[명성 이에 남쪽 지방 가득케 하소]
-『동명집』 제7권.
다음으로 변산과 관련한 주목할 만한 한시를 남긴 문인으로는 서하(西河) 이민서(李敏敍)[1633~1688]를 들 수 있다. 이민서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대사간·대제학 등을 지냈는데, 1678년 병으로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현(興德縣)에 우거(寓居)하면서 변산을 유람하고 지은 칠언 율시가 전해진다. “세상 사람들이 변산을 방장이라고도 하고 봉래라고도 하니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일컫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특별히 빼어난 경관을 사랑하여 실증한다[世稱邊山爲方丈 或稱蓬萊 未知何所據而有是稱也 余特愛其奇秀 因以實之]”라는 설명과 함께 남긴 시는 다음과 같다.
방장봉래숙품제(方丈蓬萊孰品題)[방장산과 봉래산이라고 누가 품평하였나]
금은대궐고금미(金銀臺闕古今迷)[금은으로 지은 대와 궐을 고금에 의심하였네]
명파호묘의오대(溟波浩渺疑鼇戴)[바닷물 아득하여 자라가 이고 있는 듯하고]
암굴청명인학서(巖窟靑冥認鶴棲)[바위 굴 깊어 학이 깃든 줄 알겠네]
영약자생비속채(靈藥自生非俗採)[영약이 자생하니 속인이 캘 것 아니고]
선인약재역오제(仙人若在亦吾儕)[신선이 있다면 또한 우리 무리이리라]
명조갱읍부구몌(明朝更挹浮丘袂)[내일 아침 다시 부구[고대의 선인(仙人)]의 소매를 잡고]
비상단애만장제(飛上丹崖萬丈梯)[붉은 벼랑 만 길의 사다리를 날아오르리]
-『서하집』 제4권.
이민서는 변산을 왜 방장산이나 봉래산이라고 하는지 모른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변산의 빼어난 경관이 신선이 살 만한 봉래산이나 방장산 같은 삼신산에 해당됨을 시를 통해 말하고 있다. 이민서는 「도솔사에서 명산을 유람 가는 현 상인에게 주다[兜率寺贈玄上人遊名山]」 같은 시도 남기고 있는데, 도솔사는 변산에 있다.
[허균과 유형원의 한시]
변산 관련 문인으로 교산 허균과 반계 유형원을 빼놓을 수 없다. 먼저 허균은 1608년 파직된 뒤에 부안에 내려와서 우거했는데 “변산의 남쪽 기슭에는 우반곡(愚磻谷)이 있습니다. 그 안이 기름지고 평탄하여 수석(水石)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습니다. 두 이씨(李氏)를 데리고 가서 집터를 정해 놓으니 소나무·대나무가 울창하고 시내와 계곡이 요조(窈窕)하여 실제로 은자(隱者)가 살 만한 곳이었습니다. 지역이 또 바닷가여서 물고기나 조개의 생산이 풍부하고, 소금을 굽고 곡식을 심으면 아무리 흉년이 들더라도 사람이 죽을 리 없습니다.”라고 하며 변산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 허균은 변산에서 변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읊거나 사람을 송별하고 맞이하며 쓴 시들을 남기는데, 그중에 한 편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신성연침걸담담(新城燕寢杰潭潭)[신성이라 내실(內室)은 하도나 깊고 깊어]
기수풍헌잠사참(寄睡風軒暫卸驂)[말 멍에를 잠깐 풀고 풍헌에 잠 붙였네]
대해운평아실도(大海雲平俄失島)[한바다에 구름 깔려 섬이 문득 없어지고]
변산일출사수람(邊山日出乍收嵐)[변산에 해가 솟아 안개 잠깐 걷혔구려]
가인묘어시초영(佳人妙語詩初詠)[가인의 묘한 가락 시를 처음 읊조리고]
도위교정주반감(都尉交情酒半酣)[도위의 사귄 정은 술이 반쯤 취해오네]
청진녹음앵백전(聽盡綠陰鶯百囀)[그늘 속에 울어대는 꾀꼬리 소리 들었으니]
수병고침몽강남(繡屛高枕夢江南)[수 놓은 병풍, 높은 베개 강남을 꿈꾸누나]
-「부안(扶安)에서 도위(都尉) 민인길(閔仁佶)을 만나고」, 『성소부부고』 제1권.
조선 후기 실학파의 시조로 평가받는 반계 유형원도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으로 낙향해 반계서당을 짓고 학문 연구와 제자 교육에 몰두한 인물이다. 그가 어느 날 일출을 바라보며 지은 「변산에서 일출을 바라보다[邊山望日出]」라는 시에는 부안 바다에서 해가 뜨는 일출의 순간이 잘 묘사되어 있다.
금계제파효휘통(金鷄啼罷曉暉通)[금계(金鷄)가 울자 새벽이 다가오고]
은해신개대지동(銀海新開大地東)[은빛 바다는 대지의 동쪽에서 열리네]
산사적광삼만리(散射赤光三萬里)[붉은빛 삼만리(三萬里) 흩어지니]
일륜초용상요공(日輪初湧上瑤空)[둥근 해 하늘 위로 처음 솟아오른다.]
-『반계유고』
변산 은빛 바다 위로 붉은빛이 삼만리 흩어지면서 솟아오르는 일출의 모습이 묘사되고 있는 시이다. 이 외에 변산 원효암에서 지은 유형원의 시도 전해지고 있다.
[변산을 노래한 그밖의 시인들]
많은 문인 학자들이 변산의 풍경에 매료되었는데 화담 서경덕(徐敬德)[1489~1546], 월사 이정구(李廷龜)[1564~1635], 우복 정경세(鄭經世)[1563~1633], 명재 윤증(尹拯)[1629~1714] 등도 변산 관련 한시들을 남겼다.
화담 서경덕은 『화담선생문집』 권1에 「변산」이라는 시가 전해지고 있다. 월사 이정구의 변산 관련 시로는 『월사집』 권18의 「유변산시역방김참봉횡주석구점(遊邊山時歷訪金參奉鋐酒席口占)」과 『월사집』 권16에 변산을 유람한 지 30여 년 뒤에 지은 「변산월명사승인오송사미기문차기축중운각기(邊山月明寺僧印悟送沙彌寄問次其軸中韻却寄)」 3수가 전해지고 있다.
명재 윤증의 문집 『명재유고』 권28, 권29 등을 보면, 윤증은 아들 손자에게 변산은 한 번 유람할 만한 곳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우복 정경세의 당시 형세를 살펴보는 일로 조정의 명을 받아 변산에 도착하여 쓴 시도 남아 있다. 그의 「변산(邊山)에 있는 석재암(釋在庵)에 묵으면서 좌병(坐屛)에 제하다」[『우복집』 제2권] 시를 보면, 변산에 있는 석재암에 머물며 마천대에 올랐던 경험과 그곳의 풍경을 서술하고 있다. 마천대는 변산 최고봉인 의상봉 병풍바위 위에 있는 곳이다.
그 밖에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던 팔곡(八谷) 구사맹(具思孟)[1531~1604]의 「직연폭포 재변산(直淵瀑布在邊山)」, 송강 정철(鄭澈)[1536~1593]이 전라도 관찰사를 지낼 때 변산에 들려 남긴 시 「여백옥봉광훈 유변산(與白玉峯光勳遊邊山)」이 있다. 수촌(水村) 오시수(吳始壽)[1632~1681] 역시 전라도 관찰사를 지내며 변산에 들려 「변산입왕시대조퇴어야정 구점증지노승(邊山入往時待潮退於野亭 口占贈指路僧)」을 남겼다. 그리고 양대박(梁大撲)[1543~1592]의 「변산인은거 변사정거도탄(邊山人隱居邊士貞居桃灘)」, 조찬한(趙纘韓)[1572~1631]의 「변산가(邊山歌)」, 홍명원(洪命元)[1573~1623]의 「복용전운영변산(復用前韻詠邊山)」, 조희일(趙希逸)[1575~1638]의 「객중즉사(客中卽事)」, 조석윤(趙錫胤)[1606~1655]의 「도만경현 망변산(到萬頃縣望邊山)」 등의 한시가 전해지고 있다. 또한 유계(俞棨), 이선(李選), 이해조(李海朝), 이덕수(李德壽), 신광수(申光洙), 황윤석(黃胤錫), 차좌일(車佐一), 정원용(鄭元容), 박영원(朴永元), 송병선(宋秉璿), 이기(李沂), 김제민(金齊閔), 홍적(洪迪), 김지남(金止男), 권극중(權克中), 박미(朴瀰), 이세화(李世華), 홍원섭(洪元燮) 등 수많은 문인 학자들의 변산 관련 한시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