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12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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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卞山來蘓寺記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영미 |
[정의]
1781년 신경준이 부안 변산의 내소사에 대해서 기록한 글.
[개설]
「변산내소사기(卞山來蘓寺記)」는 조선 후기의 문인 신경준(申景濬)[1712~1781]이 1781년(정조 5)에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에 있는 내소사(來蘇寺)의 명칭 유래를 비롯하여 다양한 이야기를 기록한 글이다. 신경준은 자가 순민(舜民)이고, 호는 여암(旅菴)이며, 전라도 순창 출신이다. 세조를 거부하고 순창에 내려와 은거했던 신말주(申末舟)의 10세손으로 호남의 4대 실학자 중에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경서와 역사, 실용적인 학문에 밝아 문자학(文字學), 성운학(聲韻學), 지리학(地理學) 등 다방면에 걸친 저술을 남겼으며, 그의 문집 『여암유고』가 전한다. 「변산내소사기」는 『여암유고』 권4의 399쪽에 실려 있다.
[구성]
이 글은 크게 5개의 의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내소사’ 이름이 유래하게 된 소정방과 관련된 여러 설 소개, 유형원(柳馨遠)[1622~1673]의 『여지지(輿地志)』 기록 소개, 내소사가 있는 변산의 아름다움, 내소사의 화재와 창건·중창 연도, 작가가 기문을 쓰게 된 이유 등의 내용이 나타난다.
[내용]
「변산내소사기」는 ‘내소사’라는 이름이 유래하게 된 소정방과 관련된 여러 설을 소개한다. 그리고 내소사의 화재와 창건, 중창 연도를 밝히고 마지막으로 작자가 기문을 쓰게 된 이유를 서술하고 있다.
부안현 변산의 내소사는 절의 『고적기』에 의하면,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여기에 와서 주둔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소정방이 이 절을 세웠다고도 한다. 그러나 작자는 역사적인 근거를 들어 소정방이 내소사에 머물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평가한다.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한 것은 660년(신라 태종 무열왕 7)[경신년] 7월인데 9월에 군사를 물렸으니 마땅히 내소사에 올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여전히 “소정방이 백제의 땅에 오 도독부(五都督府)를 설치했으니 내소사에 온 것이 이상하지 않고, 소정방이 주둔했던 곳의 땅속에 묻힌 비석을 보면 ‘소(蘇)’라는 한 글자가 아직 남아 있으니 이것으로 증거할 수 있다”라고 하면서 소정방이 내소사에 왔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소정방이 불교를 숭상해서 절을 세우려 했다고 하더라도 하필 바다 건너 다른 나라[우리나라]에 세웠을 리가 없다’고 한다. 또한 ‘소정방이 온 것은 동방이 혼란하기 때문이었는데 하필 그가 온 것을 다행으로 여겨 이름으로 지었겠는가’라고 의아해하며 소정방과 연관된 내소사 이름 유래설을 의심하기도 한다. 한편 유형원의 『여지지』 기록에 따르면, 신라 혜구 스님이 창건한 소래사는 두 개가 있었는데, 내소사는 아차봉 아래에 있었다. 그런데 중세에 소래사를 아차봉 아래로 옮겨서 ‘내소사’라고 개명했다고 한다. 절은 화재를 겪어 문서와 서적이 다 사라졌고, 옛일은 아득해서 알 수 없다.
‘내소사’ 이름의 정확한 유래는 밝힐 수 없지만, 내소사가 위치한 변산은 ‘영주산’으로 일컬어지며 기이하고 수려하게 멀리 솟아올라 있고, 앞에는 큰 바다가 펼쳐져 있어 만 리가 거울처럼 평평하니 정신이 맑고 기운이 상쾌해지는 곳이다. 번뇌가 가득한 사람도 자기도 모르게 깨어나게 할 만한 산이다.
1743년(영조 19)[계해년] 겨울에 내소사가 불타서 1744년 갑자년에 정민(淸旻) 대사가 법당을 세워 1745년[을축년]에 완공했다. 만세루와 좌우 익랑은 그 뒤에 세웠다. 36년이 지난 1780년(정조 4)[경자년]에 내선(來璿), 여천(呂天) 등 8명의 비구가 단청을 완성하고, 1781년[신축년]에 작자에게 기문을 청했다. 내소사는 명승지이기에 많은 유명한 시인 묵객들이 시문을 남겼는데, 나도 저버릴 수 없어 기문을 쓴다.
[특징]
‘내소사’라는 이름이 유래하게 된 다양한 설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소정방과 관련된 세간 이야기의 허실을 모두 기록하고, 유형원의 『여지지』 기록을 고증 자료로 삼고 있다.
[의의와 평가]
「변산내소사기」는 여타의 변산 유람기들처럼 변산의 아름다움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내용은 상대적으로 소략하다. 대신 신경준 당시까지 떠돌던 ‘내소사’ 이름 유래설을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하여 내소사에 대한 역사학적 자료로서의 가치를 획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