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0011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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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德星庵-自鳴琴 |
이칭/별칭 | 「김구의 자명금」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 |
시대 | 시대 미상 |
집필자 | 김선아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0년 - 「덕성암의 자명금」 『전설지』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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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8년 - 「덕성암의 자명금」 『전북 구비문화 자료집』에 수록 |
관련 지명 | 덕성암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 |
채록지 | 옹중리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 |
성격 | 설화 |
주요 등장 인물 | 김구|김수성|김동호|박태항|거문고 만드는 사람 |
모티프 유형 | 자명금 분실과 다시 찾기|신기한 자명금 |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에서 자명금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김구(金坵)[1211~1278]는 부안읍 선학동[현 선은동]에서 1211년(고려 희종 7)에 태어났으며, 호는 지포(止浦)이다. 저서로 『북정록(北征錄)』이 있으며 실록 편찬에도 참여했다. 변려체의 표문에 뛰어났으며 중국어와 몽골어를 잘했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거문고를 잘 탔다고 한다.
[채록/수집 상황]
1990년 전라북도에서 펴낸 『전설지』의 497~498쪽에 「덕성암의 자명금」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는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 주민 김판술[남, 80세]로부터 채록한 것이다. 2008년 한국문화원연합회 전북도지회에서 간행한 『전북 구비문화 자료집』의 575쪽에도 재수록되어 있다.
[내용]
김구는 1211년(고려 희종 7)에 태어났는데 뛰어난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고 거문고를 잘 탔는데 그가 아끼던 거문고를 후손들이 간수를 잘못하여 잃어버렸다. 그로부터 425년 후인 1703년(숙종 29)에 김구의 후손 김수성이 서울 금성 박태항 판서 집에서 거문고를 발견했는데 그 뒤에 김구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김수성은 박판서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거문고를 찾아와 부안 김씨의 재실 석동산 덕성암에 보관했다. 거문고가 덕성암으로 온 후 밤에 스스로 맑고 곱게 울렸고 집안에 경사가 있기 전에 거문고가 먼저 저절로 울려 퍼졌다.
거문고 만드는 사람이 이 소문을 듣고 거문고 보기를 간청해서 보여줬는데 거문고를 밤에 몰래 훔쳐 갔다. 뒤늦게 사실을 안 자손들이 거문고 만드는 사람을 추적하여 찾아왔지만 거문고의 오리발이 없어지고 줄도 끊어져 있었다. 김수성의 손자인 김동호가 수리하려고 거문고 명공(名工)을 찾아 고산의 유씨를 알아내어 수리하려는데 덕성암에 불이 나서 거문고도 불에 타 없어졌다.
[모티프 분석]
「덕성암의 자명금」의 주요 모티프는 ‘자명금 분실과 다시 찾기’, ‘신기한 자명금’ 등이다. 낙랑 공주와 호동 왕자 이야기에 등장하는 자명고 설화가 변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뛰어난 학자이자 정치가인 김구가 남긴 거문고가 스스로 연주를 했다는 점, 경사스러운 일을 미리 알려 주는 역할을 했다는 점은 자명금의 신비함이 흥미를 유발시키고 있다. 또한 이런 자명금을 소유한 김구의 인물됨이 특별하다는 평가가 내재되어 있다. 「덕성암의 자명금」에는 도둑맞은 거문고를 다시 찾았지만 화재로 잃게 되어 안타까워하는 마음도 함께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