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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패들과 퇴왜지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1185
한자 將敗-退倭-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시대 시대 미상
집필자 김선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0년 - 「장패들과 퇴왜지터」 『전설지』에 수록
관련 지명 장패들과 퇴왜지터 -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지도보기
채록지 서외리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지도보기
성격 설화|지명 유래담|비석 유래담
주요 등장 인물 이유|이유 부인
모티프 유형 왜적 침입|지명 유래|비석 유래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서 장패들퇴왜지터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이유(李瑜)는 1545년(명종 1)에 전라남도 영광에서 태어났는데, 부안군 상서면 통정리 도화동으로 옮겨 와 살았다. 임진왜란 때 고경명(高敬命)[1533~1592], 조헌(趙憲)[1544~1592], 김천일(金千鎰)[1537~1593] 등에게 군량·군기를 보내 지원하였고, 정유재란 때 왜적이 부안까지 쳐들어오자 의병을 모집하여 싸우다가 53세에 전사하였다. 「장패들과 퇴왜지터」는 장군이 싸움에 진 들판이라는 ‘장패들’, 3일 동안의 격전 끝에 왜적들을 달아나게 해서 ‘퇴왜지’, ‘퇴왜터’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지명 유래담이자, 정유재란에서 활약하다가 전사한 이유 부부를 위하여 타루비(墮淚碑)를 세웠다는 비석 유래담이다.

[채록/수집 상황]

1990년 전라북도에서 펴낸 『전설지』의 528~529쪽에 「장패들과 퇴왜지터」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이는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주민 이상희[남, 74세]로부터 채록한 것이다.

[내용]

상서면 되야지터로부터 감교리 일대의 들판을 ‘장밭들’ 또는 ‘장패평’이라고 한다. ‘장밭들’이란 장군이 싸움에 진 들판이라는 의미이다. 한자로는 ‘장전리(長田里)’, ‘장전리(長戰里)’라고 한다.

약 1300여 년 전 백제의 부흥군이 부안군 개암동주류성을 근거지로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과 싸워 크게 승리했고 신라 장군 28명이 이곳에서 전사했다. 그때 죽은 장군들의 28개 무덤이 지금도 청등마을 길가에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 호남 지방은 전쟁의 화를 입지 않았는데 정유재란에 왜적이 장성, 영광, 고창을 거쳐 부안까지 침입해 왔다. 그 첫 싸움이 호벌치(胡伐峙) 싸움이었다. 호벌치 싸움에서는 의병들이 패했다. 장밭들 벌판에서 벌어진 청등 싸움에는 부안군 상서면 통정리 도화동에 살던 도곡(桃谷) 이유(李瑜)라는 선비가 의병을 모아 참전했다. 3일 동안의 격전 끝에 왜적들을 달아나게 했는데 그로 인해 ‘퇴왜지’, ‘퇴왜터’라는 이름이 생겼다.

이유청등 싸움에서 전사하자 이유의 부인 부안 김씨가 전쟁에 뛰어들어 싸우다 죽었는데 이유이유 부인의 시신을 못 찾아서 신발과 옷으로 장사를 지냈다. 왜적들이 이 부인이 이유의 부인인 것을 알고 이유의 집을 찾아가 집과 서적을 모두 불태웠다. 마을 사람들이 이유 부부의 의거를 기리기 위해 ‘타루비(墮淚碑)’를 세웠는데 현재의 타루비는 1982년에 다시 세워진 것이다.

[모티프 분석]

「장패들과 퇴왜지터」의 주요 모티프는 ‘왜적 침입’, ‘지명 유래’. ‘비석 유래’ 등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의롭게 싸우다 전사한 이유 부부의 의거를 기리기 위하여 타루비를 건립하였다고 하였으니 이 내용만 보면 비석 유래담이다. 「장패들과 퇴왜지터」에는 백제의 부흥군이 나당 연합군을 물리친 일과 왜병을 맞아 목숨을 바쳐 싸운 이유 부부에 대한 자긍심이 들어 있다. ‘장패들’, ‘퇴왜지터’라는 명칭은 모두 그 당시의 전쟁과 연관된 지명이며, 그 이름을 부르면 전쟁에서의 활약상을 연상하게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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